로마가 불타고 있는데 음악을 연주한 네로의 이야기는 정치나 사회와 문화 또는 예술의 관계를 생각하는 데 있어서 한 모델이 된다. 불타는 도시를 보고 음악을 연주하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통치자가 아니더라도, 불이 난 곳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불을 끄는 일이다. 그런데 사람 사는 곳에 크고 작은 불이란 끊임이 없는 법인데, 불끄기만 해야 한다면 언제 노래할 틈이 있을 것인가. 불의 긴급도를 계산해서 음악의 자리를 마련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그런데 대체로 긴급한 대응을 요하는 불이 끊이지 않는 것이 우리 사회의 상황이다. 노동법이나 안기부법 대란이 일더니, 이번에는 한보사건이 벌어져 수렁 위에 참으로 위태롭게 서있는 것이 우리사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디에서 한가한 노래를 부를 수가 있는가. 이러한 일들을 아는체 해야 된다고 강제받는 것은 아니지만, 누구나 자신의 발 밑을 흔드는 듯한 이러한 사회의 기본 질서의 동요를 생각하지 아니할 수 없다. 이것은 작가나 시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사회적 문제들을 작품의 소재로 삼아야 한다고 느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것이 양심적 인간의 자세로서 너무나 당연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사회나 정치적 의도를 포함한 예술작품이 예술적으로 성공하는 경우는 드문 일이다. 사회나 정치 그리고 예술을 양립할 수 없게 하는 무엇이 있어 보인다. 허나, 세상이야 불에 타서 없어지든 말든, 나라가 온통 부패의 구유통으로 썩어 문드러지든 말든, 자신의 예술만을 추구할 수는 없는 일이다. 또 그러한 자세로 쓰인 작품―결국은 거짓된 의식과 태도의 소산인 그러한 작품이 제대로 된 것이 될 수도 없다. 이것은 결국 사회나 정치의 안정이 있기 전에는 훌륭한 예술작품이 나올 수가 없다는 이야기가 된다. 물론 안정이란 어느 정도의 안정을 말하는 것이고, 많은 경우에 그것은 지배층의 주변을 맴도는 사람들이 느끼는 허위의식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부분적 안정 또는 착각에서 오는 안정이라도 있어야 예술작품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위대한 예술 작품은 대체적으로 안정된 삶을 그리는 것이라기보다는 그 밑에 놓인 삶의 심연을 보여주고, 사람의 삶이 얼마나 불안정한 기반 위에 서있는가에 대하여 전율하게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의미에서 네로는 사실 예술가의 한 전형처럼 생각될 수 있다. 다만 예술가에게, 불이 노래의 주제가 되었다면, 그것은 현재의 불이 아니라 기억 속에 되살려진 불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예술작품은 험한 세상을 소재로 하더라도, 그것을 기억하고 반성하고 재구성한다. 여기에는 마음의 여유가 필요하다. 편한 생활과 좋은 예술 사이에 비례관계가 있다고 할 수는 없다. 예술가는 가난할 수도 있고, 외로울 수도 있고, 사회에 대하여 커다란 불만과 비판적 태도를 가질 수도 있다. 그러나 자신과 이웃과 친구가 사는 동네가 불타고 있음을 알면서는 좋은 예술작품의 생산에 필요한 마음의 여유를 가질 수 없다. 그것을 위해서는 조금은 조용한 구석이 필요하다.
세상은 늘 시끄럽게 마련인데, 조용한 곳이 어디에 있을 것인가. 그러한 곳은 작가의 마음 속에서 찾을 수 밖에 없다고 할 수도 있다. 이 조용한 마음은 특별한 내면적 강인성으로 또는 깊은 절망과 체념으로 얻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주변과 사회의 현실에 의하여 뒷받침되지 않고는 그러한 마음은 유지되기 어렵다. 하버마스는 행정과 정치 비대의 오늘의 사회를 설명하기 위하여 「생활 세계의 식민지화」라는 말을 쓴 일이 있다. 우리 사회야말로 생활이 정치와 경제에 의하여 식민지화한 사회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체제마저 불안정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좋은 문학작품 또는 예술작품이 나오기가 매우 어려운 환경임에 틀림없다.<김우창 고려대 교수·문학평론가>김우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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