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이상 아버지를 흔들지 말아라』지난해 「아버지 신드롬」이 우리 사회를 휩쓸자 방송가에도 「고개숙인 아버지」바람이 불어왔다. 드라마에는 무기력한 아버지들이 등장했고, 연말특집극도 하나같이 명예퇴직에 흔들리는 아버지의 모습을 그렸다.
하지만 방송에 비친 아버지상에 대한 비판도 만만치 않다. 무턱대고 상처받은 사람들의 모습만을 과장되게 묘사, 아버지를 동정의 대상으로 전락시키고 있다는 지적이다.
KBS 드라마제작국 김홍종 제작위원은 『최근 드라마에 비친 아버지상은 빗나가는 가족관계 만을 강조할 뿐, 「인생」을 담지 못하고 있다』고 말한다.
SBS 수목드라마 「형제의 강」의 작가 이희우씨도 『아무리 현실이 그렇다 해도, 자식들의 눈치나 살피는 아버지가 무슨 희망을 줄 수 있는가』라고 되묻는다.
자식들에게 가난을 물려주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다가 어느날 돌아간 가정에서 자신의 자리를 잃어버린 아버지들. 급변하는 산업화 과정 속에서 우리가 걸어온 길이기도 하다.
정신과 전문의 이나미씨는 『정신분석학적으로 아버지는 양심, 죄의식, 자기통제, 전통, 권력 등을 상징한다』고 말한다. 부권상실은 곧 통제에서 벗어나 버린 본능, 권력의 분산, 전통의 붕괴 등을 반영하는 징후이다.
따라서 최근 방송에서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왜소화한 아버지 상품」은 분별없는 부성의 파괴를 부추기고 사회의 든든한 울타리인 가족해체를 조장하는 측면이 있다.
바다와 같은 넓은 가슴을 가진 아버지, 고지식하고 무뚝뚝하지만 가족을 누구보다 사랑하는 아버지, 불의와 불법에 맞서 가족을 지키는 강한 아버지상이 필요한 시대다.
그래서 아버지역은 쉬운 연기가 아니다. 원숙한 배우만이 소화할 수 있는 「영광의 자리」이기도 하다. 표정 하나만으로 자식을 꾸짖고, 드러내지 않아도 묻어나는 속깊은 감정표현이 가능한 탄탄한 연기력을 지닌 배우의 몫이다.
드라마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다양한 아버지들의 모습. 우리는 그것을 통해 오늘의 아픔을 느끼고, 새로운 미래를 예감한다. 「흔들리는 아버지」, 「강한 아버지」, 그것은 바로 우리의 모습이 되기 때문이다.<박천호 기자>박천호>
◎아버지연기 잘하는 탤런트 베스트 5
◎박근형/자기중심 뻔뻔스런 한량
SBS 수·목드라마 「형제의 강」의 서복만(박근형)은 뻔뻔스럽다. 벌이도 없으면서 집에서는 큰소리만 치고, 오로지 공부 잘하는 장남 준수(김주승)의 앞길을 위해 나머지 자식들에게는 무제한적인 희생을 강요한다. 더구나 변변치 못한 처지에 첩까지 두고 아내 앞에서는 오히려 떳떳하게 행동한다.
하지만 서복만은 결코 밉지 않다. 오히려 측은해 보인다. 다 떨어진 내복을 입고도 헛기침을 하는 시골 한량이지만 이제는 「잃어버린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기대고 있는 권위는 「허울뿐인 권위」라는 점에서 그는 비극성을 지닌 아버지이다.
「형제의 강」의 열연으로 박근형(57)은 지난해 SBS 연기대상을 수상했다. 「형제의 강」의 작가 이희우씨는 『박근형은 작가나 연출자가 제시하는 극중 인물을 완벽하게 소화해낸다』고 말한다. 그만큼 변신에 능하다는 것이다. 주장하는 연기관도 『배우는 모든 역을 소화해야 하는 인물』이다.
◎최불암/부드러우면서 위엄 갖춰
신구와 함께 자타가 공인하는 전형적인 한국 아버지상. 17년째 출연하고 있는 「전원일기」의 김회장 역이 대표적이다. 도시의 아버지보다는 고향에 남아있는 아버지를 떠올리게 한다.
최불암(57)의 아버지역은 예로부터 내려오는 아버지상의 재현이다. 식구 많은 집안에서 아들로, 남편으로, 아버지로 자기 역할을 말없이 행한다. 자신에게 주어진 당연한 의무로 생각한다. 때로 그 무게가 짓눌러도 자신을 주장하기 보다는 희생을 택한다. 감정표현이 별로 없고 힘들어도 티를 내지 않아 식구들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일단 내린 결정에 대해서는 아내도 자식들도 함부로 거역하지 못한다.
최불암은 이런 아버지 역을 내면으로부터 연기한다. 배역과의 일체감, 작은 연기 하나에도 소홀함이 없는 성실함이 좋다. 실제보다 나이 들어 보이게 하는 투박한 얼굴선과 반쯤 덮인 눈, 털털한 음성으로 20대부터 아버지역을 맡아왔다. 「전원일기」에 함께 출연중인 김혜자와 가장 한국적인 부부 역이라는 평을 받는다.
◎이순재/고집스럽고 권위적 가장
이순재(62)의 아버지 역이 시청자들의 주목을 받게된 것은 전적으로 「사랑은 뭐길래」 덕분이다. 극중 배역이었던 「대발이 아버지」는 지금도 그의 별명이다. 이후 그에게 맡겨진 아버지역들도 대부분 같은 스타일.
그가 연기하는 아버지는 요즘 흔히 보기 힘든 아버지다. 가장이 최고라는 권위적인 사고방식과 모든 것은 가장이 책임져야 한다는 보수적인 사고방식의 소유자다. 자식들, 특히 딸들에게 엄격하고 부인에게도 때로 큰 소리를 질러가며 자기고집대로 가정을 이끌어 간다. 꽉 다문 입매에 노려보는 듯한 눈초리, 모든게 못마땅한 표정으로 마음에 들지 않으면 대놓고 분통을 터뜨려 식구들을 긴장시킨다.
그러나 알게 모르게 마음 약한 모습도 보인다. 「사랑이 뭐길래」에서 보여지듯 갑작스런 호의로 며느리를 당황하게 하기도 하고 절대로 굽히지 않을 듯하지만 결국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간다.
이순재의 아버지 역은 그래서 시청자들의 지지를 받는다. 날로 상실되어가는 부권에 대한 향수와 안타까움 때문일 것이다.
◎김세윤/자상하고 합리적 ‘현대형’
현실의 변화를 반영하는 신세대 아버지 상. 경제적으로 안정된 가정의 가장으로 가족간의 화목을 무엇보다 중시하는 현대 아버지의 이상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김세윤(57)이 맡는 아버지상은 가정적이고 자상하며 합리적이다. 집안일에 무심했던 이전의 아버지들과는 달리 작은일 하나까지 꼼꼼하게 챙긴다. 아내를 끔찍이 위하는 것은 물론이고 목소리가 커진 엄마로부터 아이들을 지켜주는 후원자 이기도 하다.
아버지역으로서의 대표작은 「사랑이 뭐길래」와 「딸부잣집」. 현재 출연중인 「LA 아리랑」과 「엄마의 깃발」, 「사랑한다면」에서의 아버지 역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가정적이라는 점에서 같은 이미지의 연장선상에 있다.
김세윤은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과 부드러운 스타일로 멜로물의 단골 주연에서 나이와 함께 자연스런 이미지 변신을 이루었다. 작품마다 엇비슷한 스타일이 단점으로 꼽히기도 하지만 한진희와 함께 가장 성공적인 케이스로 꼽힌다.
◎김인문/무능하지만 자식사랑 끔찍
『허, 모두 내 탓이여…』 KBS2 주말극 「첫사랑」의 아버지 성덕배(김인문)는 딸 찬옥(송채환)이 자신이 사다준 배탈약 때문에 유산을 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 하늘만 쳐다보며 이렇게 말한다. 지방소도시에서 극장 간판을 그리다 서울에 올라온 그는 도배질이나 하면서 겨우 자기 밥벌이만 하는 무능한 아버지다. 그러나 자식사랑은 누구못지 않다.
「법없이도 살만큼 한없이 선량하지만, 생활에서는 무기력한」성덕배야말로 김인문(58)이 20여년 동안 연기해온 아버지의 모습이다. 그것은 가지지 못한 사람, 패배한 사람의 어리숙함이기도 하고, 설움과 고통의 세월을 묵묵히 견뎌온 지난 시절 우리 아버지의 모습이기도 하다. 비쩍 마른 몸매에 구부정한 허리, 황소눈처럼 껌벅이며 느릿느릿 토해내는 충청도 사투리. 김인문은 골목길에서 누구나 만날 수 있는 평범한 아버지의 모습을 타고났다. 「첫사랑」의 작가 조소혜씨는 『김인문의 매력은 굳이 연기를 하지 않아도 분위기에서 우러나는 자연스러움』이라고 말했다.<김지영·박천호 기자>김지영·박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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