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의원·관리 힘으론 10억∼20억원 이상은 어려워/“대출불가” 직원건의에 모 행장 “어쩔 수 없는 곳 지시”『은행장들은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곳」으로부터 요청을 받았을 겁니다. 웬만한 국회의원이나 관리의 힘으로 한 기업에 수천억원대 대출이 이뤄질 수 있습니까. 10억∼20억원 정도라면 몰라도…』
시중은행의 한 임원은 『은행권의 「생리」로 볼 때 한보에 대한 5조원대 대출은 적어도 은행장 「목줄」(인사권)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인물의 개입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단언한다.
은행장들은 「형식상」 은행 주주총회에서 자체적으로 뽑도록 돼있지만 실제로는 정치권과 관련부처 등의 낙점에 따라 선출돼 온 게 관행이다. 은행장들이 「부실은행장」의 오명을 감수해가며 거액대출을 해준 것은 바로 자신의 인사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인물의 「거부할 수 없는」 요청에 따른 것이란 분석이다. 실제로 지난해말 한 은행장은 대출담당자들이 한보철강에 대한 추가대출을 해서는 안된다고 강력히 건의하자 『나도 어쩔 수 없는 곳의 지시니 따르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6공말인 92년 A은행장은 주총에서 자신이 당연히 연임하는 것으로 알고 출근했다가 주총회장에서 돌연 전무에게 자리를 넘겨줘야 했다. 또 현 정부출범 후 B은행 행장선임 전날 은행장추천위원회의 한 위원으로부터 『축하한다』는 인사까지 받았던 전무는 정작 당일 출근해서는 그동안 거론조차 되지 않았던 사람이 행장에 내정됐다는 소식에 뒤통수를 맞은듯 충격을 받았다. 은행장인사는 여전히 외부에 의해 결정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동안 은행장 선임 때 번번이 인사에 개입했던 배후의 실력자가 곧 이번 한보사태의 열쇠를 쥐고 있을 것이란 지적이다. 3공시절엔 은행장 인사권은 재무부 이재국이 쥐고 있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은행인사에 관여하지 않아 재무부가 은행인사에 깊숙이 개입했다. 이때부터 「관치금융」이란 말이 유행했다. 5공들어서 「금융계의 황제」인 이원조씨(당시 국보위원, 은행감독원장)가 은행장인사권을 휘둘렀다. 당시 은감원에 근무했던 관계자는 『이씨는 금융계나 정계의 정보원을 통해 은행장에 대한 정보를 계속 수집, 평가리스트를 작성했으며 직제상 자신의 상급자인 한국은행 총재까지 평가해 놀란 적이 있다』고 말했다.
현 정부들어서는 「이원조」와 같은 「금융계 황제」는 뚜렷이 부각되지 않았지만 「실력자」의 은행장 인사 개입설은 끊이지 않았다. 현재 은행장 인사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자리로는 관계에서 청와대경제수석을 포함한 청와대비서실 관계자, 재정경제원장관, 은감원장 등이 꼽힌다.
그러나 현정부에서는 이런 고위관료보다 정치권 실세들의 은행장 인사개입설이 자주 떠돌았다. 94년 C은행의 은행장 선출과정에서도 모 행장후보가 은감원의 부적격판정을 물리치고 전격적으로 선임돼 『정치권 실세가 뒤를 밀었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따라서 전형적인 「권력형 금융비리」인 이번 「한보사태」의 전말도 베일에 가려진 실세를 밝혀내야 실마리가 풀릴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원조씨의 경우 90년 「5공비리」수사, 95년 노태우씨 비자금사건 수사 등에서 번번이 빠져나온 전례가 있어 이번 한보수사에서 과연 배후실세가 규명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유승호 기자>유승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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