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이 정태수 한보그룹 총회장을 불러 특혜금융을 받은 경위와 자금 사용처 등을 추궁했다. 한보철강 등 관련회사와 은행 간부들이 줄지어 검찰에 불려가는 것을 보면 수사의 행보가 갑자기 빨라진 것 같다. 좀더 빨리 수사할 수 없느냐는 대통령의 채근이 있었다는 후문이다. 설(2월8일) 연휴 이전에 궁금증을 풀어주도록 하겠다는 청와대쪽의 소리가 새나오는 것을 보면 수사를 좀 서두르는 게 아니냐는 느낌을 떨쳐버리기 어렵다.수사를 서두르는 것은 권할 일이 아니다. 국민이 바라는 것도 수사의 속도보다는 제발 의혹을 낱낱이 풀어달라는 것 한가지 뿐이다. 그런데 사건에 깊숙이 관련됐을 법한 사람들이 줄지어 자취를 감추는 것은 웬일인가. 이미 상당수 관련 인사에 출국금지 조치가 내려졌지만 정작 한보그룹 자금담당 핵심간부 3명이 해외로 도피하거나 국내에서 자취를 감췄다는 얘기다. 관련자들 자택까지 철저하게 수색했다지만 비자금 장부 등 결정적인 수사자료들이 소각되거나 파기됐다는 보도도 있다. 수사를 서두르지는 않되 좀더 체계적이고 집중적이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수사와 관련해 우리가 또 한가지 경계하는 것은 이번 사건이 단순한 금융사고로 변질되는 것이 아니냐 하는 관측이다. 신문에 보도되는 정부 관계당국자들의 말을 종합해 보면 그런 뉘앙스가 강하게 풍긴다. 괜한 의심이기를 바라지만 만일 수사가 그렇게 매듭지어진다면 큰일이다. 그것은 대통령 주변을 포함해서 한점 의혹도 남지 않도록 철저히 수사하겠다는 정부의 약속과 거리가 먼 결과가 될 것이다.
대통령이 연일 칼국수 파티를 열면서 문민정부의 청렴성을 강조하는 동안 이번 사건은 계속 곪아 왔다. 국민이 분하고 억울해 하는 것이 바로 그 점이다. 따지고 보면 사건은 6공화국때부터 잉태돼 정권의 대를 이어 비호돼 왔다고 할 수 있다. 민주당이 91년에 발표한 수서사건 백서(한국일보 1월30일자 1면)에 의하면 한보철강은 89년 허위 자금동원 계획서를 근거로 사업 인가를 받았고, 공장은 국가 공유수면 매립계획이 멋대로 변경된 곳에 세워졌다. 부지선정 당시 동자부 환경청 해운항만청 등 관련 부처들은 반대의견을 냈다가 슬그머니 철회하거나 묵인했다. 이토록 정치권력의 비호를 받은 이 공장은 문민정부에서도 은행 납입자본을 훨씬 초과하는 돈을 대출받았고, 심지어 담보 없이도 수천억원을 빌렸다. 이것을 단순한 금융사고라고 믿을 사람이 있겠는가.
검찰이 밝혀야 할 의혹은 한두가지가 아니다. 지금 시중에는 『한보 돈 못받은 사람은 불출』이라고 쑥덕거리는 소리가 있다. 정계 관계 금융계인사 등 정태수씨가 돈 빌리고 사업 확장하는데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은 다 관련됐을 것이라는 추측마저 있다. 이런 의혹들을 모두 벗겨내어 뇌물공화국이라는 오명을 씻지 못하는 한 우리의 망국병은 영원히 고칠 길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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