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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순 김영진·유송일씨 일가 일문일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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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순 김영진·유송일씨 일가 일문일답

입력
1997.01.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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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오려고 ‘김성애 사돈’ 소문 내/중국서 ‘박 사장’ 만나 도움 받았다/배 타고서야 두가족 서로 알게돼김영진씨 가족은 기자회견에서 필체가 달라 의혹을 산 「우리 가족로정의 일기」는 해광군의 메모를 해광군과 형 해룡군, 어머니 김찬옥씨가 베껴 만든 것 이라고 밝혔다. 다음은 일문일답.

―귀순 과정은.

(김영진) 『두만강을 건너 중국 동북3성에서 여기저기 떠돌며 농사일 막노동 등을 했다. 「박사장」이란 분을 만나 그 분 집에서 머무르며 신세를 졌다. 그 분 소개로 만난 조선족의 도움을 받아 기차를 타고 중국의 남서쪽 항구로 갔고 밤에 밀항선을 탔다. 한국으로 오면서 풍랑이 심해 아이들이 멀미를 심하게 했다』

―해광군이 일기를 쓰게 된 배경과 일기의 필체가 다른 이유는.

(김해광) 『먼 훗날에도 이 일을 잊지 않기 위해 일기를 썼다. 중국 체류 당시 내 메모를 나와 형, 어머니가 베껴 쓴 글을 「한국의 선생님들」이 가져갔다』

―김씨 가족과 함께 귀순하게 된 경위는.

(유송일) 『김영진씨 가족을 전혀 알지 못했다. 배에 타고서야 알았다』

―귀순 동기는.

(유송일) 『24년간 군복무를 하면서 남한 방송을 듣고 남한 사회와 귀순자들의 삶을 잘 알고 있었다. 95년 8월 상급자인 경리부 간부와 다툰 적이 있다. 이 일로 출당당했고 직장에서도 해고당해 노동자로 전락했다. 이때부터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 한국에 가야겠다고 결심했다』

―중국 체류중 다른 탈북자를 만난 적이 있는가. 또 안기부 직원과 접촉한 사실은.

(유송일) 『다른 탈북자는 보지 못했다. 안기부 직원과 접촉은 없었다』

―김일성의 처 김성애 남동생과 사돈간이라고 발표 됐는데.

(김영진) 『아주 먼 친척중에 김성애 남동생과 사돈이 있다. 김성애 남동생과 사돈간이라고 소문을 낸 이유는 보다 쉽게 한국에 가기 위해서였다』

―베이징의 한국대사관을 두번이나 찾아 갔다는데.

(김찬옥) 『첫번째는 대사관을 찾지 못했고 두번째는 용케 대사관을 찾아 (망명을 위한) 접수를 하고 대사관 직원도 만났다. 이 직원은 「중국과의 외교관계 때문에 도와주지 못한다」고 말했다』<서사봉 기자>

◎의문점에 대한 설명/첫 신고한 ‘동양1호’는 밀항선인듯/남루하면 중이동때 의심 미리 옷 준비/일기는 해광군 메모 여럿이 베낀 것

김영진·유송일씨 일가 기자회견에서는 석연치 않았던 귀순과정에 질문이 집중됐다. 기자회견을 통해 어느 정도는 해명됐으나 풀리지 않은 의문점은 여전히 남아 있다. 당사자들의 증언과 당국의 설명을 토대로 이를 정리했다.

▷구조상황◁

김씨와 유씨는 중국 밀항선에서 섬(북격렬비열도)에 내린 뒤 우리 해경 경비정에 구조되기 전까지 아무 배도 보지 못했다고 증언했다.

이들을 처음 발견해 해경에 신고했다는 수산물 운반선 「동양1호」는 정체가 무엇인가. 당국은 「동양1호」의 존재를 아직까지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

당국은 「동양1호」가 귀순자들을 태우고 온 밀항선일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 밀항선이 이들을 북격렬비열도에 내려 놓은 뒤 신고했다는 것이다.

▷모습◁

귀순자들이 풍랑과 악천후를 헤치고 온 사람들답지 않게 옷차림이 말끔했고 지친 기색이 안 보였다는 지적에 대해, 옷차림이 남루하면 중국에서 (항구까지)이동하는 데 (탈북자라는)의심을 받기 때문에 미리 깨끗한 옷을 준비했다고 해명했다.

또 남한에 도착하자 『기쁘기 한량 없어서 밝고 명랑했다』고 말했다. 반면에 이들은 『바람이 불고, 풍파가 심하고, 배가 고장이 나고, 모두 멀미를 심하게 해서 고통이 심했다』고 험난했던 밀항과정을 전했다.

▷당국,언제 알았나◁

귀순자들이 중국을 출발한 뒤 밀항조직이나 후원자 등 누군가가 우리측에 이같은 사실을 통보했다고 당국은 설명하고 있다.

이들은 중국에서 여러차례 귀순을 시도했기 때문에 당국은 이미 이들의 신원을 파악한 상태에서 도착에 대비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의 귀순 사실과 신원이, 구조가 완료된 22일 하오 4시30분보다 앞선 3시54분에 공개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일기필체◁

해광군은 틈틈이 메모를 했고 지난해 7월 한국의 모일간지 기자가 일기를 요구하자 형 해룡군과 어머니, 해광군이 함께 메모를 베껴 써 건네줬다.

또 「한국 선생님들」의 권유로 방송사에 보낸 일기는 해광군이 메모를 보고 다시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다음날 일을 그날 일기에 적기도 했다.

그러나 일기의 내용이 13세 소년이 썼다고 보기에는 전체적으로 너무 어른스럽고 3월23일자 일기에 나오는 「한국」 「남북의 조국통일」 등의 단어는 일기를 쓸 때 누군가 도와 주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자아내고 있다.<김병찬 기자>

◎유송일씨의 한국행/직장 잃고 어머니 여의고 처와 생이별하고

김영진(51)씨 일가의 그늘에 가려 있던 유송일(46)씨 일가의 탈북동기·경위 중국체류과정 등이 기자회견을 통해 밝혀졌다. 24년간 강원도 김화에서 군생활을 한 유씨는 탈북직전 근무지인 오중흡대학의 상사와 다툰 것이 화근이 돼 출당과 함께 탄광근무가 결정되자 귀순을 결심했다.

유씨는 탈북 후 중국체류중 어머니 이의순(65)씨를 여의었고 처 이영순(39)씨와는 생이별하는 아픔을 겪었다.

유씨는 청진에서 학업을 마친 뒤 68년 인민군에 입대, 86년까지 46사단 탱크대대경비소대에서, 92년 4월까지는 46사단 부대대장(소좌·소령)으로 근무했다.

유씨는 오중흡대학 후방부 관리과장으로 재직하던 95년 8월 직권을 남용한 경리부 간부와 다툰 뒤 유씨는 결국 노동당에서 출당당하고 직장에서도 쫓겨났다.

유씨는 함경도 길주 탄광으로 배속되자 탈북을 결심했다.

유씨는 96년 3월4일 어머니와 처 아들 청송(15)군 딸 청옥(13) 청금(11)양과 함께 얼음이 언 두만강을 건넜다.

유씨일가는 재중동포들의 도움으로 중국 선양(심양)에서 생활했고 지난해 6월 어머니가 숨을 거두었다. 유씨부부는 부부싸움끝에 결국은 헤어졌다.

유씨는 선양에서 밀항알선업자를 소개받아 김씨일가와 함께 서해를 건너 한국땅을 밟았다.<이영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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