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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베,지진의 슬픈 그림자(장명수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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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베,지진의 슬픈 그림자(장명수 칼럼)

입력
1997.01.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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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베(신호)의 중심가에서 비극을 기억하기는 어렵다. 95년 1월17일 새벽, 단 15초 사이에 6,000여명의 목숨을 빼앗아간 지진의 흔적은 깨끗이 지워져 있다. 새로 짓거나 수리한 상점들은 산뜻한 치장으로 손님을 맞고, 식당에는 웃음소리가 넘치고, 살아 남은 대형건물들 사이로 활기찬 인파가 흐르고 있다.지진 피해가 가장 심했던 나가타(장전) 지역조차 그냥 지나쳐 가기 쉽다. 무너진 가옥의 잔해를 말끔히 치운 집 터들은 단지 개발을 기다리는 빈 땅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빈 땅에 촘촘하게 박혀있는 사금파리들, 찻잔과 접시와 대접의 산산조각난 파편들이 그곳에서 파괴된 생을 증언하고 있다. 그리고 그 빈 땅에는 얼마전 지진 발생 2주년을 맞아 죽은 이들에게 바쳤던 시든 꽃과 술잔과 찹쌀떡이 곳곳에 남아 있다.

지진의 상처는 이제 어떤 지역, 어떤 사람들에게만 살아 있다. 공공시설의 복구가 완벽할수록 지진은 점점 빨리 잊혀져 가고 있다. 대부분 가난하고 늙은 지진의 피해자들은 피해와 소외라는 이중의 고난을 겪고 있다. 나가타지역의 마을회관에서 만난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일본은 자본주의 국가이므로 피해자들은 자기 힘으로 일어서야 하고, 자연재해는 국가가 보상할 수 없다는게 정부 입장인데, 그것은 부자들에게나 맞는 소리다. 늙고 가난한 사람들은 주택자금을 융자받을 자격도 없고, 그 돈을 갚아나갈 능력도 없다. 지금까지 우리가 받은 구호금이란 국민들이 보내준 성금을 가호당 34만엔(약 240만원)씩 나눠준게 전부다』

『우리 동네에서는 주민의 10%인 120명이 죽었다. 살아 남은 사람들은 빨리 집을 짓고 삶의 터전으로 돌아와야 하는데, 시는 2년이 넘도록 검토만 하고 있다. 기다리다 못해 집을 지은 사람들은 앞으로 도시계획이 확정되면 집을 헐어야 할 형편이다』

『중앙정부와 지방정부는 서로 할 일을 미루고, 국회와 관료들은 한없이 시간을 끌고, 눈에 보이는 공공시설 투자에만 관심을 갖고 있다. 정치란 다수의견을 따라야 한다지만, 다수가 우리 소수의 어려움을 해결해 줄 수 없다면 그런 민주주의가 무슨 소용인가. 시는 지금 제3공항 건설을 추진한다는데, 지진 피해자 구호보다 공항건설이 더 급한가』

고베의 서쪽 화려한 신시가지에 마련된 임시 난민촌에도 근심이 가득하다. 100여세대가 입주하고 있는 산뜻한 콘세트 건물들은 전기· 수도·하수도·전화시설과 어린이 놀이터·유치원·슈퍼마켓 등을 고루 갖추고 있으나, 희망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입주자의 대부분은 65세가 넘은 여자노인들이고, 40%가 독신세대인데, 많은 노인들이 지진의 후유증으로 이른바 「고독사」의 위험에 처해 있다. 지진으로 가족을 잃었거나 참혹한 경험을 한 사람들 중에는 슬픔과 혼돈 속에서 단지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이 많다. 시당국은 가라오케 등 오락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많은 자원봉사자들이 그들을 돕고 있으나, 알코올남용과 우울증 등을 막지 못하고 있다.

6,425명의 사망자, 32만명의 이재민, 가옥파괴 19만3,000채, 총 피해 10조엔을 기록했던 효고(병고)현의 대지진은 일본의 위기 대처능력과 경제력과 국가경영 철학을 보여주는 시험대이기도 했다. 지진의 발생에서 2년간의 복구과정에 이르기까지 경직된 관료주의, 규제가 많은 법과 행정, 지방자치제의 허점 등 여러 문제점들이 드러났다. 그리고 국내외의 많은 사람들이 갖게 된 가장 큰 의문은 세계 제일의 경제대국인 일본에서 수많은 지진 피해자들이 왜 그처럼 속수무책으로 방치되어 있는가, 자연재해의 피해란 국민 각자가 극복할 수 밖에 없는 것인가, 온국민이 항상 지진의 위협을 받고 있는 나라에서 왜 지진에 대한 사회보장 제도를 확립하지 못했는가 라는 점이다.

『고베는 시한폭탄을 안고 있는 도시』이며 『지진 피해자들은 일본의 보트피플』이라고 언론은 말하고 있다. 『우리는 정부와 시당국이 잃어버린 보따리에 불과한 존재』라고 한탄한 피해자도 있었다. 시민단체들은 지진등 자연재해에 대한 국가적인 대책을 세워야 한다는 운동을 펴고 있다. 고베 지진의 뒤처리는 국가의 부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우선순위가 무엇인가 라는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으며, 우리에게도 매우 흥미로운 과제라고 생각된다.<이사대우 편집위원·도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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