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신규사업 진출’ 통해 본 기업로비 실태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신규사업 진출’ 통해 본 기업로비 실태

입력
1997.01.28 00:00
0 0

◎권력에 줄대기 사세 총동원/해당부처의 공략대상 선정→대상자 1인당 수십명 연고자 확보→로비담당자 별도발령 및 승진→향응 거부땐 취미 등 다른 방향 시도우리나라에서 로비는 정계와 재계의 접점이다. K그룹 상무를 지낸 K씨는 『권력이 있으면 로비가 있고 로비만 잘하면 기업은 일어난다』고 거리낌없이 말했다.

기업은 신규사업 추진을 결정하면 바로 행정부 주무 부처를 대상으로 로비를 시작한다. 먼저 해당 부처의 인사조직표를 놓고 기획 인사팀에서 공략대상을 꼼꼼히 검토한다. 결정권자로부터 담당 실무자에 이르기까지 결재선상에 있는 인물중 공략대상을 결정하면 그 사람이 어떻게 그 자리에 오를 수 있었는 지를 따진다. 누구 줄이냐, 어느 학교 출신이냐, 출신지역은 어디냐 등을 분석한 뒤 이에 맞춰 로비팀을 구성한다. 해당 관료의 출세길에 영향을 미치는 유력인사와 줄이 닿는 사원들을 고른다. 이 인사는 로비 대상자의 상관일 수도 있고 외부인일 수도 있다.

대상자 1명당 수십명의 연고자가 확보된다. 사원들은 이미 입사때 친분있는 사회저명인사를 회사에 보고했기 때문에 그리 어렵지 않은 작업이다. 모그룹의 간부들은 매년 5명 이상의 「손이 닿는 유력인사」를 적어 내기도 한다.

로비 담당사원으로 뽑히면 바로 본사 연구소로 인사발령이 난다. 해외지사에 나가 있든 지방에 내려가 있든 가리지 않는다. 연구소 연구원 명함이 관료들과 접촉하기에 가장 무난하기 때문이다. 때로는 벼락승진을 하기도 한다. 하루 아침에 과장이 차장으로, 차장이 부장으로 둔갑한다.

이들은 각개격파식으로 로비대상자를 따라 붙는다. 로비에 쓰이는 자금은 기업주의 특별지시에 따라 전결처리된다. 엄청난 액수가 아니면 사용내역을 묻지도 않는다.

대상자가 금품과 향응공세에 거부반응을 나타낼 경우 담당자는 원래의 일자리에 돌아 가고 다른 사람이 나서 거부반응의 이유를 탐색한 뒤 취미나 종교 등 다른 방향으로 재접촉을 시도한다. 개각 후 신임각료가 다니는 교회의 신도수가 늘어난다는 말도 있다. 웬만한 대상자는 2, 3차 공세에는 무너진다.

전직관료를 영입해 해당부처 로비를 맡기는 경우에도 사원을 활용한 로비와 병행하도록 해 효과를 높인다.

최근 우리나라 기업도 이같은 직접로비에 전적으로 의존하던 단계에서 벗어나 유리한 여론을 조성하는 우회적인 방법을 병행하기 시작했다. 가장 치밀하고 세련된 로비를 자랑하는 S그룹은 승용차 사업 진출을 위해 이 문제에 영향을 미칠 만한 정계 학계 언론계 소비자단체 등 각계 인사를 폭넓게 골라 대대적인 로비에 나섰다. 『동원되지 않은 임원급이 없었다』는 말이 나왔고 로비 대상자만도 3,000명에 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 비해 H그룹의 로비방법은 기업주의 스타일과 흡사하다. 「밀어 붙이기」식으로 그때 그때 상황에 따라 대처해 왔다. 최근에야 정보망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됐다고 관계자들은 전했다.

다른 기업도 H그룹과 크게 다를 바 없지만 권력이 한점에 집중되는 우리의 정치구조상 최고 권력층 주변과 연결고리를 갖는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염영남 기자>

◎로비 주타깃 어디인가/결정권자 바로 아랫사람 노린다/인허가권 가진 관청이 우선/사안 잘아는 국장급 주표적/5·6공땐 대통령도 대상에 부모·아내통한 접근까지

우리나라는 「로비 왕국」이다. 덩치 큰 건설공사 수주나 공기업 불하, 예산 배정, 관세율 조정 등 대형사업과 주요정책 결정에는 어김없이 로비가 개입한다. 거액의 은행대출도 마찬가지다. 은밀하게 행해져 그 실체가 제대로 드러나지 않을 뿐이다.

누가 누구를 대상으로 로비를 하는가. 전직관료 출신으로 대기업체에 몸담고 있는 K씨는 우리나라에서 1차적인 로비대상은 역시 관청이라고 잘라 말했다. 『대기업 인사 때마다 전직 장·차관 등 고위관료 출신들이 임원급으로 영입되는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기업으로서는 전직관료를 영입하면 여러가지 이점이 있지요. 행정고시 합격자이니 능력은 객관적으로 검증된 셈이고 「전관예우」를 받을 수 있어 대정부 로비에 분명히 도움이 됩니다. 특히 경제부처의 노른자위 부서를 거친 공직자는 정년이 70세라는 얘기가 공공연합니다』

물론 대상이 분명하더라도 고도의 기술과 노하우, 인맥이 없으면 효과적인 로비를 기대하기 어렵다고 K씨는 덧붙였다. 『정부의 정책방향을 상세히 알고 있어야 하고 정책결정과정과 관련인사를 잘 알고 쉽게 접촉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현안을 놓고 여러 곳에서 로비가 들어올 경우 아는 사람 목소리가 크게 들리는 게 인지상정입니다』

지금까지 드러난 로비관련 공직자 비리를 살펴보면 이익집단의 대관청 로비의 주대상은 정책결정권자의 바로 아래 직위에 있는 사람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부처차원에서 결정되는 사안은 내용을 정확히 알고 장차관을 움직일 수 있는 국장급이 주표적이었다. 물론 장차관에도 「인사」는 행해졌다. 또 부처 의견을 참조해 대통령이 최종 결정을 내리는 사안은 장차관이 로비의 직접대상이 되기도 했다. 5·6공때는 아예 대통령이 로비 대상이 되고 형식적으로 장차관에도 「떡고물」이 돌아 간 예도 있었다. 차세대 전투기 기종 선정 등은 대통령과 국방부장관이 모두 로비의 대상이 됐던 좋은 예이다.

국회의원도 중요한 로비대상이다. 여당의 P의원 보좌관은 요즘 「스테비오사이드」라는 말만 들어도 온몸에 소름이 끼친다고 밝혔다. 지난해 정기국회 당시 재경위에서 소주의 감미료로 쓰이는 스테비오사이드의 인체유해 가능성을 지적한 이후 주류업계의 파상 로비공세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그는 『관련업계가 「P의원이 특정업체의 로비를 받아 그런 발언을 했다」며 관계기관에 로비를 하는 바람에 혼쭐이 났다』며 「만나서 얘기나 좀 하자」 「점심이라도 같이 하자」는 전화가 끊임없이 걸려오는 등 야단법석이 일어 숨어다녀야 했다고 말했다.

야당의 K의원. 『노골적으로 돈봉투를 내 놓으면 오히려 대하기가 편합니다. 「나는 돈을 받지 않는다」고 거절하는데도 계속 버틸 경우 「이것 공개해도 되느냐」고 물으면 그냥 나가버리지요. 혈연이나 선·후배, 은사 등을 통해 접근할 때는 정말 괴롭습니다. 심지어 부모님이나 집사람을 통한 우회로비도 있습니다』<김성호 기자>

◎“뒷거래 관행 이대로 둘순없다”/선진국제도 도입 로비공개/공직자 관련기업 취업규제/시민단체 등 입법추진 활발

「음성적인 로비관행을 더이상 방치해서는 안된다」

전문가들은 『행정부처나 국회를 상대로 하는 음성적인 청탁형 로비관행이 사회적으로 심각한 문제를 낳고있다』며 『미국처럼 까다로운 규정을 둘 수는 없겠지만 어떤 형태로든 로비의 폐해를 줄이기 위한 다양한 법적 장치를 마련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국회보다는 행정부의 정책결정권이 강한 우리나라에서는 행정관료에 대한 로비를 규제할 방안이 더욱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서울산업대 행정학과 윤홍근 교수는 『현행 법체계상 국회에 대한 로비를 규제하고 있는 법규는 전무한 실정』이라며 『형법의 뇌물죄나 정치자금법 변호사법 등이 있으나 조직적으로 이뤄지는 음성적인 로비를 막는데는 무용지물』이라고 지적했다.

정치권 안팎에서도 대국회 로비를 투명하게 할 법적·제도적 장치가 시급하다는 주장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지난해 11월 국회제도개선특위의 김중위(신한국당) 위원장은 『국회는 스스로의 도덕적 기초를 확립하기 위해 선진국 로비제도의 도입을 적극 검토할 때가 됐다』며 『로비활동을 공개화하면 「뒷거래」의혹이 상당히 줄어들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앞서 14대 국회에서도 각계 인사들로 구성된 국회제도개선위(위원장 박권상)가 대국회 로비의 제도화를 거론했으나 우리 문화와 동떨어진다는 반대에 부딪혀 흐지부지됐다.

시민단체들도 로비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참여민주사회 시민연대」의 한 관계자는 △이해 당사자의 관련상임위 배정 규제 △상임위 활동 등 모든 의사결정 과정의 공개 △별도 입법을 통한 로비 규제 △각 상임위와 이익집단간의 정책토론 제도화 △주요쟁점 입법시 공청회 의무화 △고위 공직자 퇴직후 일정기간 관련기업·단체 취업 규제 등 다양한 방안을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김성호 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