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에 빠져 DJ로,영화팬서 감독으로/음지의 문화를 양지로 펼치며 취미가 일이 되어버린 사람들/그들에게서 우리문화의 미래를 본다마니아. 언제나 할 말이 많은 그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주제가 나왔다 하면 듣는 이의 얼굴이 좀 일그러져야만 그제서야 마지못해 이야기를 끝맺는다.
반면 프로가 된 옛 마니아를 인터뷰하기는 까다롭다. 이들은 「내 편」이 아니다 싶으면 언제나 대화를 중단할 자세가 돼 있다. 괴벽인가? 한편으로 사회생활에 잘 적응할 것 같지 않은 이들이 소외받는 대신 「프로」로 대접받는 것은 이들이 그만큼 문화 속에서 전위로서의 몫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심야 FM 프로를 10년째 진행해 오고 있는 DJ 전영혁(45). 그는 매스컴을 피한다. 야단스러움이 싫기 때문이다. 대신 그는 팝마니아들 사이에 하나의 「존재」로 자리함으로써 더 편안함을 느끼는 사람이다.
『국민학교 6학년 때 비틀스 음악을 듣고 부터』라는 게 마니아 전영혁의 출발이다. 그러나 그는 끝내 얼마나 많은 음반을 수집했는지, 어떤 오디오로 음악을 듣는 지는 밝히지 않는다.
『마니아는 감상자일 뿐 수집가가 아니다. 애정만 있다면 감동은 동네 레코드점에서 구한 음반에서도 느낄 수 있다. 음반 한 장을 구하기 위해 어디어디를 다녀왔다는 사람은 마니아라기보다는 수집가가 맞을 것이다』 프로로서 그는 이제 빌보드 음악, 영어권 음악이 아닌 3세계 음악을 소개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프로 마니아다운 지향이다.
「장미빛 인생」 「정글 스토리」의 영화감독 김홍준(41)씨. 서울대 인류학과를 다니면서 영화서클 얄라성을 조직하고, 미국 템플대에 유학가서는 영상인류학 석사를 마쳤다. 유학기간 중에도 학교 극장에 틀어박혀 닥치는대로 영화를 봤다. 「구회영」이라는 필명으로 낸 영화서적 「영화에 관해 알고 싶은 두세가지 것들」이 꾸준한 인기를 모으고 있는 것은 이론적 바탕 외에 마니아로서의 열정이 곳곳에 숨어있기 때문이다. 마니아였던 그가 강단 대신 충무로로 뛰어들어 고생을 자처한 것은 어쩌면 숙명이랄까.
『국민학교 2학년 때 혼자 가서 본 3류 한중 합작 영화의 충격 때문에 마니아가 됐다』는 정성일(38·영화 전문지 키노 편집장)씨는 프랑스 문화원에 「출근」하다시피 하면서 영화에 대한 꿈을 지펴나갔다. 감독 홍기선 박광수 김홍준, 교수 김소영 전양준 강한섭 유지나 등이 그때 동료 마니아들.
그는 『마니아는 선동가, 조직가가 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80년대 마니아는 가능하면 많은 이들에게 문화를 전파시켜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다. 하지만 요즘 마니아는 좋아하는 문화 속에만 빠져 소모적이 돼가는 것 같아 안타깝다. 진정한 마니아는 문화를 양지를 끌어 올려 대중에게 알려야 한다』 소명의식이 그에게는 있다. 어쩌면 이런 고집스러움이 오늘 우리 문화 속에서 팝이나 영화의 새 지평을 연 이유가 되고 있는 지도 모를 일이다.<박은주 기자>박은주>
◎마니아들의 활동무대 PC통신
침실에서 카페, 그리고 PC통신까지. 마니아 공간의 변천과정이다. PC통신은 숨어 있는 마니아들이 모습을 드러내는 대표적인 공간이 됐다. 익명성이 보장되는 가운데 정보를 공유할 수 있고, 다양한 차원의 의사소통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PC통신 동호회는 마니아들의 주요활동 무대. 영화, 음악 관련 동호회가 가장 많고, 최근의 관심영역으로 떠오른 만화와 애니메이션영화, 스포츠 동호회 그리고 UFO(미확인비행물체)나 SF(공상과학) 관련 동호회처럼 마니아적 성향이 특히 강한 것까지 다양하다.
마니아들은 동호회 내에서 다양한 소모임을 만들기도 한다. 하이텔 메탈음악 동호회 내의 모던록 소모임. 최근에 등장한 「언니네 이발관」이나 「델리 스파이스」같은 록 밴드들은 여기에서 활동하던 마니아들이 결성한 밴드이다.
금기시되는 영역에 대한 정보를 나눌 수 있는 것도 마니아들이 PC통신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이유이다. 하이텔 애니메이션 동호회나 나우누리 대중음악 동호회에서는 일본 쪽 계보를 훤히 꿰고있는 마니아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마니아들이 사회적인 영향력을 확대시킨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도 PC통신이다. 댄스뮤직 그룹 룰라의 표절 시비와 「X-파일」 신드롬 뒤에는 마니아의 힘이 있었다.
이제 마니아들은 인터넷으로 활동무대를 넓히고 있다. 각 전문 분야의 최신 정보를 접할 수 있는 인터넷 뉴스그룹은 마니아들의 새로운 무대로 떠오르고 있다. 마니아는 인터넷 공간 속에서 세계화해간다.<김미경 기자>김미경>
◎마니아들이 ‘시장’을 움직인다/스포츠용품·음반 등 소수 마니아대상 마케팅 활발
「마니아 취향」은 이제 마케팅의 주요한 참고자료가 됐다. 뭔가 남과 다르게 튀어보이길 바라는 요즈음 사람들에게 「소수 마니아가 즐기는 것」은 매력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굿인터내셔널」이 발매한 70년대 아방가르드 재즈 전문 레이블 「블랙 세인트(Black saint)」는 마니아 마케팅의 대표적 사례. 지구레코드에서 발매하는 메탈 음악 레이블 「로드러너(Roadrunner)」, 아트록 앨범을 전문으로 하는 「시완 레코드」도 모두 마니아 취향의 전문 레이블이다.
마니아 마케팅은 방송도 예외가 아니다. 「X-파일 신드롬」을 만들어낸 TV 외화시리즈 「X-파일」은 방송 프로그램에 미치는 마니아의 영향력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컬트영화, 마니아를 위한 영화」 요즈음 영화 포스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고 카피다. 95년 영화배급사 「백두대간」이 처음 선보인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희생」은 예상을 뒤엎고 매진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숨어있던 영화 마니아의 존재가 확실히 드러난 「사건」이었다. 스포츠업계의 마니아 마케팅은 중고등학교 주변에 속속 문을 열고 있는 NBA용품 전문숍에서 확인할 수 있다. 「NBA전문숍」은 일본만화 「슬램덩크」와 NBA 마니아들이 만들어낸 새로운 스포츠용품 시장이다.<김미경 기자>김미경>
◎전문가 진단/정윤수 문화비평가/문제적 인간,마니아
현대 산업사회의 근본적인 특징은 대중문화의 일상화·전면화에 따른 감각과 정서의 하향평준화 현상이다. 대중문화는 그것을 소비하는 자들을 균질한 감각의 테두리에 가둔 채, 유행이라는 이름 아래 끓임없이 새로운 문화상품을 소비하는 자유를 허락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이같이 강요된 소비의 자유에 갇힌 자들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강요된 자유에 반기를 들고 개성적이고 독창적인 문화수용행위를 통해 도전하는 사람들이 있다. 지속적이고 공격적인 문화수용행위를 서슴없이 행사하는 그들. 90년대의 독특한 산물인 이들을 우리는 마니아라고 부른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거대 문화자본은 자신들에게 비판적인 감수성의 소유자라 할지라도 이윤이 남는다면 얼마든지 밀어줄 수 있는 탄력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 점만으로 볼 때, 마니아의 비판적 문화수용은 단순한 열정만으로는 충족될 수 없는 것이 된다.
평균적 감수성에 도전하는 마니아들의 몸짓이 천박한 문화귀족주의와 저도 모르게 내통해 이 사회의 본질적 흐름과는 유리되어버리는 경우도 많다. 또 동시대 정서와는 동떨어진 채, 어떤 「고상한 것」을 찾아 헤매는 고립된 자위행위로 옮아가는 현상도 있다. 이들의 문화차별화 전략은 평균하향적 정서의 강요 못지않게 끔찍한 문화적 지배의 대표전략이다.
문화라는 깔때기로 모든 것을 여과시켜 버리는 요즘의 과열된 문화주의 열풍에 비추어 볼 때, 우리 시대의 마니아는 중요한 선택의 지점에 도달한 것처럼 보인다. 비판과 부정의 정신으로 고통스럽게 참다운 문화의 열매를 찾아나설 것인가. 아니면 돈과 시간이 남아도는 사람들끼리 「교양있어 보이는 모임」을 만들어 보통사람과는 다른 특정한 기호를 열심히 소비하는 천박한 족속이 될 것이냐 하는 선택의 지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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