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 대통령과 하시모토 류타로(교본룡태랑) 일본총리간의 한일정상회담은 무엇보다도 양국정상이 번거로운 의전절차를 생략하고 편한 자세로 양국간의 현안문제를 논의한데 그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같다. 이름하여 정상간의 「실무회담」이라고 하는 이런 종류의 회담방식은 교통과 통신수단이 발달한 오늘날의 세계에서는 보편적인 추세이기도 하다.양국 정상은 25일 일본의 휴양도시 벳푸(별부)에서 2차례에 걸쳐 일체의 외교적 격식을 피한 채 미래지향적인 양국관계구축을 위한 의견 등을 교환했다. 두 정상은 특히 대만 핵폐기물의 북한 반입에 공동대처키로 함으로써 대만정부의 반인륜적인 행위는 이제 국제적인 공분의 대상이 됐음을 의미한다.
양국은 이번 정상회담을 통해 회담의 형식만을 간소화한 것이 아니라 논의 의제마저도 축소한 흔적이 엿보인다. 이미 양국은 지난 15일 이케다 유키히코(지전행언) 일본외상의 방한으로 서울에서 이번 벳푸회담의 논의 의제를 사전조율한 바 있다. 위안부문제 등 과거역사와 독도문제 등, 양국간의 민감하고도 껄끄러운 「뇌관성 의제」를 제외하기로 묵시적인 합의에 도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제는 양국이 껄끄러운 문제라고 해서 일시적으로 덮어 두기로는 했지만 그것이 소멸되는 것은 아니라는 데 있다. 더러는 초기단계에서 바로 잡을 기회를 놓침으로써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도 못막는」 우를 범하는 경우를 우리는 과거의 역사에서 많이 경험한 바 있다.
양국간에 존재하고 있는 사안이 미묘하면 미묘할수록, 드러내놓고 공개적인 논의를 통해 타협점을 찾는 것이 외교의 정석이라고 믿고 있는 우리는 양국이 비록 껄끄러운 문제라고 해서 이를 논의의 뒷전으로 물리친 데 대해 여간 아쉽게 생각지 않는다.
특히 일본은 정상회담을 하루 앞둔 24일 현직 관방장관이란 사람이 위안부를 「돈받는 공창」이라고 주장하는 철면피한 망언도 서슴지 않았다. 역사문제를 이번 회담에서 덮어 두기로 한 양국간의 묵시적 합의가 뒷날 더 큰 화를 자초할 수 있는 중요한 단초가 바로 여기에 있음을 지적지 않을 수 없다.
이번 회담에서 양국이 주요의제로 심도있게 논의한 바 있는 일북수교문제 등 일본의 대북정책에 대해서도 우리는 향후 일본정부의 태도를 주시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일본은 이번 회담에서 말로는 남북관계의 추이와 4자회담에 대한 북한의 호응등 한반도 상황을 종합적으로 검토하고 한국정부와 긴밀한 사전협의방침이 대북정책의 근간임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공조」를 다짐하고서도 행동으로는 이율배반적인 경우가 허다했던 과거를 굳이 들먹이지 않더라도 일본은 이제 경제력에 걸맞게 정치적으로도 대국다운 면모를 보일 때도 되지 않았는가 하는 것이 우리의 솔직한 소회이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