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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쉬운 유학 탈선 부른다/수업료만 내면 손쉽게 입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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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쉬운 유학 탈선 부른다/수업료만 내면 손쉽게 입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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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01.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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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학점·출석관리 느슨/일부 10대 흥청망청 생활로 교민들 얼굴에 먹칠지난해 12월19일 밤 호주 시드니 스트라스필드 거리의 D카페. 주인과 20대 종업원 3명 모두가 한국인인 한국식 가라오케 술집이다. 침침한 조명과 한국 X세대의 최신 인기가요, 대형 멀티비전 화면에 반복 상영되는 20대 한국 남녀 무명배우의 사랑놀음, 남자 화장실 벽의 낯뜨거운 외국 여배우 반라사진….

밤 10시30분이 지나자 10여명의 남녀 한국 청소년들이 무리를 지어 들어와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불렀다. 이중에는 초등학생티가 채 가시지 않은 앳된 얼굴의 소녀도 있었다. 술값이 시드니의 여느 술집에 비해 곱절 가까이 비쌌지만 이들은 아무 거리낌 없이 고급양주와 안주를 시켜 먹었다. 한화로 10만원이 넘는 시바스 리걸 세트와 2만6,000원짜리 과일안주가 몇차례나 테이블로 들어갔다. 휴대폰을 든 한 여학생은 『빨리 오라』며 친구들에게 연신 연락하고 있었다. 술판은 자정넘어까지 계속됐다.

종업원에게 『손님이 생각보다 적다』고 한마디 건네자 『지금 여름방학이라서 이렇지 학기중에는 늘 만원』이라고 자랑하듯 말했다. 호주는 18세이하 미성년자에게는 술을 팔지 못하도록 법으로 규제하고 있다. 그런데도 이 업주는 버젓이 불법을, 그것도 한국 청소년을 대상으로 저지르고 있었다.

종업원은 이곳이 한국에서 온 중·고 유학생들이 즐겨 찾기로 유학생 사회에서 소문난 술집이라고 밝혔다. 이틀전인 17일 밤에는 한국청소년 5, 6명이 술집 앞에서 만취해 패싸움을 벌이다 경찰에 연행되는 망신을 사기도 했다.

시드니 총영사관에 따르면 지난해말 현재 호주의 한국 유학생은 7,800여명으로 이중 1,500명 정도가 현지 중고등학교에 다니거나 어학연수중인 10대이다. 최근 청소년의 호주유학이 각광을 받는 것은 학습능력을 비교적 엄정하게 사전 평가하는 미국 영국 등과는 달리 연 7,000∼8,000 호주달러(약 470만∼535만원)의 수업료를 내면 손쉽게 유학비자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교민들은 『일부 철없는 청소년 유학생들이 전체 한국인의 얼굴에 먹칠을 하고 다닌다』고 개탄했다. 재호주 한국 총유학생회 강정운(29·뉴사우스 웨일스대 경제학과) 회장은 『청소년 유학생의 탈선은 상당수가 분명한 목표도 없이 유학을 온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또 부모나 친척 등 보호자 없이 기숙사나 교민 가정 또는 호주인의 집에서 지내는 청소년일수록 쉽게 방황의 늪에 빠지고 있다고 전했다. 시드니 캠시에서 한 고교 유학생을 맡고 있는 박모(47)씨는 『아들을 맡긴지 1년이 넘었는데도 부모가 얼굴 한번 비치지 않는다』고 부모의 무관심을 개탄했다.

대학생들도 별 차이가 없다. 학업능력이 떨어지는 일부 부유층 학생의 무절제한 생활태도는 곧잘 얘깃거리가 되곤 한다. 시드니 교민대상 정보지인 「생활정보」를 발행하는 김용호(40)씨는 『한국유학생은 승용차 구입시 새차를 뽑는 호주에서도 몇 안되는 계층의 하나』라고 말한다. 또 5만∼6만 호주달러 짜리 고급승용차를 고리대금업자에 저당잡혀 가며 카지노에서 돈을 탕진해 학업을 중단하거나 도망을 다니기까지 하는 학생도 있다는 것이다.

시드니 총영사관의 박영중(29) 교육담당관은 『현지인보다 비싼 수업료를 내는 유학생들에게 상대적으로 후한 학점과 느슨한 출석관리 등의 특혜를 주는 호주대학의 정책이 탈선을 부추기는 측면도 있다』고 지적했다.<시드니=유성식 기자>

◎호주 증권거래소 국제전략분석가 장수진씨/“교포 2세들이 오히려 더 한국적”/다인종사회 살아가려면 자기전통 유지 필요

『제 눈과 제 얼굴 모두가 한국인이잖아요. 저녁식사는 꼭 김치와 된장찌개를 곁들여 먹어요. 명절도 한국과 똑같고요』

호주 증권거래소에서 국제전략정책 분석가로 활약하고 있는 교포 2세 장수진(27)씨는 『나는 한국인』이라고 잘라 말했다. 어릴 때 호주로 건너 와 호주식으로 교육받고 호주인들과 섞여 호주시민으로 지내고 있지만 한번도 자신을 호주인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다.

그래서인지 교포 2세에 대한 모국의 인식이 안타깝다. 『교포 2세를 외국인처럼 보지만 오히려 더 한국적이에요. 1년에 한번씩 모국에 들러 보면 한국의 젊은이들이 훨씬 더 서구화한 듯한 느낌이 들어요. 우리는 한국의 문화와 관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살아요. 다인종 사회에서 살아가는 데는 현지문화 못지않게 자기전통을 유지·보호하는 것이 중요하거든요』

4세때인 74년 부모님을 따라 호주로 이민 온 그는 어린 시절 외로움이 유난했다. 부모님은 매일 일을 나갔고 주위에는 한국친구 한명 없었다. 『한국사람은 초등학교때 시드니의 한인교회에서 처음 만났어요. 학교에 백인친구들은 많았지만 마음을 터 놓고 사귀기엔 너무 벽이 높았어요』

백호주의정책이 폐지되긴 했지만 동양인에 대한 차별은 아이들에게까지 남아 있었다. 『짖궂은 백인 남학생들이 매일 「칭총」이라 놀려 대고 때리기까지 했어요. 울면서 집에 온 것이 한두번이 아니었죠』 그러나 고등학교 이후 인종 차별은 눈에 띄게 줄었고 대학에서는 백인친구들도 많이 사귈 수 있었다. 『해묵은 인종주의가 약해진 이유도 있지만 내 스스로가 언어·문화적으로 동화해 이국인의 인상을 덜 풍긴 때문일 겁니다』

시드니대학 경영학과를 중퇴하고 89년 일본금융회사에 입사, 4년간 금융실무를 익혔고 93년 호주금융회사에 다니며 공부를 계속해 대학을 마쳤다. 95년 국제정책 분야가 신설된 호주증권거래소로 자리를 옮겼다. 개인사무실에 비서까지 제공됐다.

그는 기회가 닿는 대로 한국에서 모국어를 배우고 싶어 했다. 『가족들과의 일상적인 대화에서도 대개 영어를 써요. 어린 시절 부모님은 일 나가시고 혼자 학교에서 영어로 공부했으니 제대로 모국어를 배울 기회가 없었지요』

거꾸로 대부분의 한국계 이민들이 언어 장벽 때문에 제대로 호주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도 안타깝다. 『한국인들은 시드니의 캠시와 같은 특정지역에 너무 몰려 살아요. 현지인들과 섞여 언어와 문화를 익힐 생각을 안해요. 말이 통하지 않으니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찾지 못하는 거죠. 언어·문화적 장벽이 없는 2세들은 호주사회에 훌륭하게 뿌리내리고 있잖아요』<시드니=배성규 기자>

◎대북무역의 대부 천성수씨 3형제/“남북한 화해에 조금이나마 기여”/맏형 1년에 수차례 방북/남북 중개무역도 관여

호주생활 20년째를 맞은 천용수(44), 지수(41), 성수(37)씨 3형제는 자타가 공인하는 대북무역의 대부. 북한의 산삼과 건강식품 등 특산물과 광물을 수입하는 것은 물론 남북한간 중개무역에도 깊이 관여하고 있다. 특히 맏형 용수씨는 북한통으로 1년에도 6, 7차례 북한을 방문한다. 취재팀이 찾았을 때도 그는 업무차 북한을 방문중이었다.

천씨 형제에 따르면 남북한은 주문자상표부착 생산방식(OEM)으로 대단위 교역을 행하고 있다. 남한 기업의 주문을 받아 북한 현지에서 신발 의류 가방 등을 생산, 남한으로 수출하며 천이나 고무 등 원자재는 남한에서 공급한다.

서류상으로는 천씨 형제가 낀 간접무역이지만 실제는 직교역이나 다름없다. 막내 성수씨는 『북한당국은 완제품을 외부와 격리된 비밀 상표부착소로 보내 한국상표를 붙이고 있다』고 밝혔다.

이들 형제의 호주생활은 아버지 천정호(69)씨가 76년 월남 패망과 함께 월남에서 호주로 옮기면서 시작됐다. 냉동창고 기사였던 아버지 밑에서 가난하게 자라난 이들은 일찌감치 사업에 손을 댔다. 맏이인 용수씨는 81년부터 한국에 벽돌과 유칼립투스나무 등 테라스용 건축자재를 수출했고 지수·성수씨 형제는 선박에 음식물을 공급하는 선식업체에서 일하다 한국선원들을 만나면서 83년 독립했다. 『주위 사람들은 「선주들과의 유대관계와 배의 정확한 입출항 정보 없이는 3개월 이상 못 버틸 것」이라고 코웃음을 쳤지요. 아시아인을 무시하는 관행 때문에 늘 선금을 주고 거래해야 하는 등 어려움도 많았어요. 그러나 병이 난 아시아계 선원들에게 병원을 주선해 주고 통역을 해주면서 인심을 얻어 중견 선식업체로 성장했지요』

80년대 중반 3형제는 노동당정부가 추진하는 자원재활용 사업에 뛰어 들어 폐지 재활용업체를 설립했다. 오래지 않아 중국인 폐지회사를 인수하고 정부의 환경정책에 적극 협조, 환경업계에서 독보적 위치를 확보했다. 90년 호주탄광회사가 북한에서 추진하던 금광사업권을 인수하게 된 것도 정계인사의 주선 덕분이었다. 『북한의 여건 때문에 초기엔 어려움이 많았어요. 총리가 직접 소개서를 보내는 등 호주정부의 지원으로 헤쳐 나갈 수 있었죠』

금광사업을 인연으로 이들 형제는 대북 거래에 본격적으로 매달렸고 92년 북한에 지사를 설치, 남북한 중개무역을 시작했다. 『북한 사람들은 순진하고 착해요. 우리 형제는 비록 호주국적이지만 그들과 민족적 동질감도 느낄 수 있어요. 그러나 북한의 경제사정이 워낙 안좋아 사업확장이나 신규사업 투자는 힘듭니다』

남북한간 교역을 중개, 화해와 통일에 조금이나마 기여하고 있다는 게 이들의 긍지다. 『남북을 모두 상대하다 보니 미묘한 문제로 어려움을 겪을 때도 있었지만 남북관계가 호전돼 교역이 더욱 확대됐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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