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세 우리 문학의 세 천재로 벽초 홍명희 육당 최남선 춘원 이광수가 꼽힌다. 한학의 3재로는 육당과 정인보 변영만을 꼽기도 하고, 육당 대신 벽초를 꼽는 사람도 있다.국보를 자처하던 고 양주동은 생시 어느 강연에서 『조선의 머리를 열이라 할 때 춘원이 아홉을 가졌고 내가 0.5, 나머지 0.5를 3,000만이 나눠 가졌다』고 말했을 만큼 춘원을 천재중의 천재로 쳤다. 그러나 춘원은 육당을 당대의 천재로 꼽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도쿄(동경) 유학중 벽초에게서 육당을 소개받아 그의 글을 읽은 춘원은 일기에 『확실히 그는 천재다, 우리 문단에 제1지 될만하다』고 썼을 정도다. 춘원은 같은 방에서 하숙하던 벽초도 높이 평가했다. 문단생활 30년 회고록에서 『군은 문학적 식견에서 독서에 있어서 나보다 늘 일보를 앞섰다』고 술회했다.
세 천재는 두살 터울로 1888년생인 벽초가 제일 연장자였고, 다음이 육당, 춘원 순이다. 세 사람은 여러 면에서 공통점을 갖고 있다. 같은 시대에 도쿄유학을 했고, 귀국해서는 각각 다른 분야에서 선구적 역할을 했다. 불운한 만년까지도 닮았다. 일제 말기 조선총독부의 압력을 못 이긴 육당과 춘원은 우리 청년 학도들을 일제의 전장으로 내모는 궤변과 기고를 서슴지 않아 지탄을 받았다. 그러나 벽초는 훼절하지 않았다.
엊그제 『북한의 실상이 벽초의 소설 임꺽정 시대와 너무 비슷하다』고 말한 한 탈북자의 기자회견을 보고 벽초의 만년을 생각해 보았다. 일제때 지조를 지킨 그는 광복후 북쪽의 체제를 택해 아쉬움을 샀다. 48년 월북, 김일성 정권 수립에 협조한 공로로 내각 부수상까지 지냈지만 김일성과 타협한 그의 만년이 행복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할아버지의 유업을 이어 미완성인 임꺽정 완결편 「청석골대장 임꺽정」을 써낸 손자 홍석중도 당의 노선과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작년 봄 숙청됐다는 소식이 있었다. 만년이 불행한 것도 천재들의 운명인가.<논설위원실에서>논설위원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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