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계 이민 동결” 일부의원 인종주의 발언/학교·직장서도 차별은 존재/그러나 아시아인 투자가 절실한 만큼 노골적 백호주의는 힘들다/다만 ‘안보이는 차별’은…백호주의(White Australia Policy)는 부활하는가. 호주에서는 지난해 무소속 폴린 핸슨 하원의원의 인종주의 발언으로 백호주의 논쟁이 뜨겁게 달아 올랐다. 호주가 73년 백호주의 포기를 공식 선언한 후 추구해 온 다민족 다문화 사회의 이념이 흔들리고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 것이다.
핸슨의원은 지난해 9월 의회연설에서 『아시아계 이민들에 의해 호주는 조만간 수렁에 빠지게 될 것』이라며 『아시아계 이민 유입을 차단해야 한다』고 정부의 이민정책을 강력히 비난했다. 야당인 노동당은 이에 반발, 핸슨 의원의 사과를 요구했다. 문제는 집권 자유당 존 하워드 총리의 태도였다. 그는 『의원은 의회내에서 표현의 자유를 누린다』며 침묵, 묵시적으로 동조하는 듯한 인상을 풍겼다. 10월에는 무소속 그램 캠벨 하원의원이 『호주내 폐결핵의 만연은 아시아 이민들 때문』이라고 발언, 인종주의 논쟁에 기름을 끼얹었다.
더욱이 현지언론의 여론조사 결과 「아시아계 이민을 동결해야 한다」는 의견이 53%에 달해 호주 국민의식에 잠재한 인종주의 성향을 시사했다. 이에 앞서 6월 호주정부는 『이민들이 영어실력 부족으로 호주 사회에 잘 적응하지 못한다』며 일단 96∼97 회계년도에 이민을 9,000명 줄이기로 결정했다. 영어실력으로 보아 그 대상이 주로 아시아계가 될 것이라는 게 현지의 분석이었다.
호주사회의 잠재적인 인종주의를 반영하듯 한국 교민들도 보이지 않는 차별을 겪고 있다. 한 교민은 학교에서의 인종차별에 우려를 표했다. 『고등학교 다니는 딸애가 인종적 차별에 충격을 받아 울고 온 적이 한두번이 아닙니다. 교사가 백인학생들에게 「말 안들으면 한국아이 옆에 앉힌다」는 인종주의적 발언을 하는 경우도 있어요』
또 다른 교민은 백인학생들이 아시아계 학생들을 따돌리거나 「칭총」(중국어 발음을 빗대 아시아계 학생을 비하하는 호칭)이라고 놀려댄다고 말했다.
취업이나 승진에도 차별은 존재한다. 법적·제도적인 측면에서의 차별은 없지만 전문적 능력을 가진 한국인들이 영어능력 부족을 이유로 사무직이나 전문직 취업에서 배제되고 있다. 시드니에서 교포 생활정보지를 발행하는 김용호(40)씨는 『영어에 능숙한 교포 2세들도 승진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불이익을 당한다』고 말했다.
백호주의 부활움직임에 대해 아시아 각국은 크게 반발하고 있다. 지난해 11월에는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각국 이민들이 핸슨 의원과 하워드 총리에 대한 규탄집회를 가졌다. 말레이시아의 모하메드 마하티르 총리는 『호주에 진출한 말레이시아 기업과 국민을 소환할 것』이라고 으름짱을 놓기도 했다.
그러나 백호주의가 노골적으로 부활할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인다. 70년대 이후 대아시아 정책과 교역을 강화해 온 호주로서는 아시아국의 투자와 지원이 절실한 상황이다. 호주 수출의 73%가 아시아국 대상이며 10대 교역국중 8개국이 아시아국이다. 따라서 최근의 백호주의 현상은 일부 정치인의 감정표현 수준일 뿐 정책의 변화를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게 지배적인 견해이다.
그렇지만 교민들은 정치인들의 잇단 인종주의 발언에 속이 상해 있다. 인형과 의류 등 관광특산품을 생산하는 「미루(MEEROO) 오스트레일리아」의 안계명 사장은 『아시아의 일원으로 편입된 호주가 아시아인을 배척한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아시아 이민의 투자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게 호주의 현실입니다. 정치인들도 이런 사실을 알고 있지만 백인들의 정서적 우월감과 아시아 이민에 대한 뿌리깊은 반감을 이용, 정치적 인기를 얻으려는 거지요. 백인사회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볼 때 앞으로도 학교와 직장, 지역사회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차별은 계속될 것입니다』<시드니=배성규 기자>시드니=배성규>
◎인종주의 발언 호주의원 규탄 권기범 변호사/“우리애들 컸을땐 인종차별 절대 없어야”/우리도 호주 구성원/정치적 힘 갖기위해 시의원 도전
『우리 아이들이 컸을 때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에서 앞에 나서기로 했습니다. 속으로 곪지 않고 이렇게 공론화한 것도 어찌보면 다행입니다』
호주의 아시아계 이민에 대한 폴린 핸슨 의원의 인종차별 발언을 규탄하기 위해 지난해 11월24일 시드니에서 열린 소수민족 연합집회에서 한인대표로 등단했던 권기범(34) 변호사. 그는 『호주가 그동안 지향해 온 다문화사회의 완벽한 실현을 위해서는 한동안 투쟁과 시련이 필요하다』면서 『우리의 항의와 자구 노력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우리는 결코 황인종, 한인이라는 또 다른 인종주의적 시각에서 핸슨 의원의 발언을 문제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호주의 구성원이고 주인인데 이를 악의적으로 부인하려 하는 발상에 대해 분노하는 겁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호주는 이민을 허용하는 다른 나라에 비해서는 그래도 모범적으로 다민족사회를 운영하고 있는 나라』라고 강조했다. 다만 핸슨 의원과 같은 사회일각의 부당한 움직임에 미온적으로 대처할 경우 인종간 대립과 갈등을 빚고 있는 미국 등의 전철을 밟게 될지도 모른다고 지적했다. 그는 『핸슨 의원 발언 이후 「혼혈아는 만들어선 안될 잡종」이라는 극단적인 인종차별 발언으로 사임한 남호주 포트링컨시의 부시장이 곧바로 재당선되는 등 최근 심상찮은 기류가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전했다.
권변호사는 『싱가포르 홍콩 태국 정부는 이같은 파문에 대해 호주제품 불매운동을 벌이고 관광객 및 유학생 파견을 중단하겠다고 위협하는 등 호주정부에 압력을 행사하고 있다』면서 『우리도 한국정부의 적절한 대응을 요청하는 탄원서를 발송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그는 77년 한국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부모와 함께 호주로 온 한국계 이민 「1.5세」이다. 시드니의 뉴사우스 웨일스대에서 토목공학을 전공하고 잠시 이민성에 근무하다 뉴사우스 웨일스대 로스쿨에 재입학, 변호사 자격을 딴 뒤 92년 한인밀집 지역인 시드니 캠시에서 개업했다.
권변호사는 30대 자영업자들의 모임인 한인 청년상공인 연합회가 올 봄 지방의회선거를 겨냥, 밀고 있는 시의원 후보이기도 하다. 『정치적 힘을 갖지 않고는 한인의 위상은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 그와 상공인 연합회의 생각이다. 그래서 그는 요즘 캠시 일대의 유력인사들을 접촉하며 출마기반 다지기에 여념이 없다. 주변사람들은 『한인유권자가 많은 데다 권변호사의 지명도가 날로 높아지고 있어 호주이민 사상 첫 한인 정치인이 탄생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호주 이민성 이주 담당관 스티언보그씨/“한인들 위상 높이려면 영어실력 키워야”/영어소통 100% 가능해야 취업 등 문제 해결
『한국인들은 강한 단결력과 근면성으로 호주사회에 잘 적응하고 있습니다. 다만 한인의 위상과 고용률을 높이려면 영어구사 능력을 제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호주 이민성의 레일라 스티언보그 이주담당관은 스리랑카 출신으로 스웨덴인 남편과 결혼해 10년전 호주로 건너 온 이민이다. 그래선지 한인을 비롯한 소수민족 문제에 깊은 이해를 보였고 호주내 인종차별 문제에도 관심이 남다르다.
―한국이민들이 성공적으로 호주에 정착하고 있다고 보나.
『한인들은 공동체 의식이 아주 강한 것 같다. 특히 한국의 가장은 가족에 대한 책임의식이 유별나 빠른 정착의 원동력이 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한다』
―한인사회에 과제가 있다면.
『역시 영어가 문제다. 영어를 100% 이해해야 취업 등 모든 문제가 풀린다. 이는 한인들만의 고민은 아니다. 베트남계 등 다른 아시아계는 물론 유럽의 이탈리아나 그리스계 이민들조차도 영어때문에 애를 먹고 있다. 직업소개소에서 실시하는 직업영어 코스가 일단은 도움이 될 것이다. 젊은 한인들의 영어실력은 괜찮은 편이어서 한인의 생활기반은 갈수록 확대될 것으로 본다』
―한인들은 호주에서 인종차별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고 하는데.
『어느나라든 인종차별이 없을 수는 없다. 비뚤어진 시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늘 있게 마련이다. 나도 스웨덴 유학시절 단지 머리 색깔이 검다는 이유로 놀림을 당한 적이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대다수 호주인은 차별의식이 없고 호주사회가 점점 나은 방향으로 변해 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난해 폴린 핸슨 의원의 인종차별 발언으로 최근 분위기가 뒤숭숭한데….
『핸슨 의원도 엄청난 비난 여론에 부딪혀 결국은 자신의 발언이 잘못이라고 시인했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 호주 전체인구의 7%에 불과한 아시아계 이민때문에 호주경제가 잠식된다는 그의 주장은 말도 안되는 소리다』<시드니=유성식 기자>시드니=유성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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