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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의 배신인가/염재호 고려대 교수·행정학(한국논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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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의 배신인가/염재호 고려대 교수·행정학(한국논단)

입력
1997.01.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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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어닥친 명퇴바람 잔혹한 시장경쟁시대/상호능력 극대화가 노사가 함께 사는 길지난해에 이어 올해에도 변함없는 화두는 명예퇴직에 대한 것이다. 특히 지난 연말에 강행된 노동법 개정으로 중년 가장들의 신분위협은 보다 현실적인 것으로 다가왔다. 정리해고제는 표현에서조차 잔혹한 시장의 논리를 대변하는듯한 인상을 짙게 풍기고 있다. 조직의 효율성이라는 논리만으로 언제 정리되고, 해고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회사원들을 무겁게 짓누르게 된 것이다. 일밖에 모른다고 가정에서도 설 자리를 찾지 못하는 우리 아버지들로서는 심한 배신감과 소외감을 느끼게 되는 순간이다.

자신의 삶을 직장이라는 조직에 위탁하여 봉급을 받으며 생활해 온 것은 인류 역사상 그리 오래된 생활양식은 아니다. 이는 산업혁명 이후 형성된 생산양식의 변화와 20세기에 들어와 가속화한 대량생산체계의 산물에 불과하다. 포디즘(Fordism)과 과학적 관리법으로 대표되는 표준화한 생산공정이 효율성을 향상시키게 되자 보다 많은 개인들은 계약에 의해 자신의 생산활동을 회사라고 하는 조직에 위탁하게 되었다. 하버드대의 경영사학자 A 챈들러 교수의 표현대로 보이는 손에 의한 기업들의 수직적 통합과 대규모화를 통해 기업의 생산성과 안정성이 크게 확대되었다. 따라서 개인은 개별적 생산활동보다는 대기업에 취업하여 기업에서 요구하는 제한된 업무만을 수행하는 것으로 보다 나은 생활이 보장된다고 인식하게 되었다.

하지만 20세기가 저물어 가면서 시장은 우리에게 대규모 조직의 효율성에 의심을 갖게 만들고 있다. 대규모 조직의 관료제화는 내부거래비용을 증대시키고, 환경의 변화에 둔감하게 만들고, 소비자의 창의적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경직된 조직이라는 비난을 받게 한다. 21세기의 새로운 시장의 경쟁은 다품종 소량생산이 대량생산을 대체하고, 생산공정의 효율화보다는 소비자의 구매 창출을 요구하고, 주어진 업무의 수행보다는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필요로 하게 된다. 따라서 21세기에는 벤처기업이 활성화하고, 대기업 내부에서도 계층제적 구조보다는 소규모 팀 중심의 조직분열이 나타나서 이를 네트워크로 연결시키는 구조로 변모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이 경우 당연히 요구되는 조직의 덕목은 제도화한 업무수행 능력보다는 개인의 창의적 능력에 있게 된다.

우리 사회도 지난 30여년간의 고도경제성장기에서 대기업의 효율성에 크게 의존해 왔던 것이 사실이다. 특히 급격한 경제성장과 수출주도의 산업구조가 그것을 부추겨왔다. 대기업의 성장은 구성원의 안정된 신분을 보장해 주었고, 회사원과 회사는 가족공동체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성장의 둔화, 치열한 국제시장의 경쟁은 기업으로 하여금 조직의 생존을 위해 조직원에 대한 배신을 꿈꾸게 하고 있다. 이는 특히 안정된 직장, 즉 개인이 조직에 안주하여 그 덕을 보려고 하는 곳에서부터 먼저 시작된다. 경쟁과 효율의 논리로 인해 사회가 구조조정, 조직혁신, 생산성향상 등을 요구하며 조직으로 하여금 배신을 강요하고 있다.

결국 21세기로 가는 길목에서 국내외로 나타나는 엄청난 변화의 파고를 기업조직도 구성원과 함께 헤쳐나가야 한다. 먼저 개인은 기업이라는 조직에 안주하려는 꿈을 20세기의 무릉도원으로 흘려보내야 하는지 모른다. 기업조직은 잔인한 시장의 논리에 의해 움직이기 때문에 대규모 조직의 거대함에 은닉하기보다는 자신의 능력계발을 통해 무장해야 한다. 기업은 언제나 배신할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기업도 비효율적인 구성원을 제거하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단순한 사고를 극복해야 한다. 발상의 전환으로 새로운 사업창출의 가능성이 있는 부문에 인력을 배치하고, 유인체계를 효과적으로 설계하여 비효율적인 구성원들이 기존에 발휘하지 못했던 능력을 끌어내는 방안을 강구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제 조직과 구성원은 팽팽한 긴장관계에서 상호능력을 극대화시키는 것만이 함께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인지 모른다.

하지만 아직도 안정된 직장이라는 이유만으로 취업을 하겠다고 추천서를 부탁하러 찾아오는 학생들을 볼 때 안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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