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메모리반도체 세계 지배 야심/94년 3억4,000만불 투입/미 업체 첨단기술 인수/연 20% 고속성장 거듭/올매출 “7억불 이상”94년 11월 현대전자가 미국 AT&T GIS사의 비메모리 사업부문을 인수한다고 발표하자 세계 반도체 업계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세계 반도체 시장중 메모리부문을 석권하고 있는 한국 기업이 부가가치가 높은 비메모리 분야에도 뛰어든다는 도전장이었기 때문이다. 이 회사의 인수가격은 3억4,000만달러, 한국돈으로 무려 2,700억원이 넘는 거금이었다. 상상하기도 힘든 거금에 비하면 이 회사는 외관상으로 크게 내세울게 없다. 종업원 수는 당시 1,850명(현재는 2,300명), 생산규모는 현대전자 이천반도체공장의 3분의 1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현대전자는 무엇을 보고 이만한 거금을 지불했는가. 이 회사가 25년의 역사를 바탕으로 축적해놓은 비메모리 반도체와 관련한 기술력을 사들인 것이라는게 현대전자의 답변이다. 현대전자가 인수한뒤 심비오스 로직으로 이름을 바꾼 이 회사의 생산품인 비메모리 반도체는 국내서 치중하고 있는 메모리 반도체와 달리 고부가가치의 제품이다. D램을 위주로 하는 메모리 반도체는 정보를 저장하는 소자로 설계가 비교적 단순해 낮은 기술력으로도 생산이 가능하다.
이에 반해 주문형반도체(ASIC) 마이크로프로세서 등을 일컫는 비메모리 반도체는 집적도가 높아 디자인이 복잡하고 제품의 조건에 맞도록 일일이 설계를 해야하는 어려움이 따른다. 따라서 비메모리 반도체는 공장의 생산규모보다 인력 설계기술 시스템이 중요시되고 제품의 부가가치도 높아질 수 밖에 없다. 반도체를 황금의 쌀이라고 표현하는 것도 바로 비메모리 제품을 칭하는 것이다. 세계 반도체시장중 메모리 부문이 30%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모두 비메모리 제품이 차지하는 것도 이같은 차이에서 기인한다.
72년 미국 컴퓨터업체인 NCR의 반도체 공급업체로 출발한 이 회사는 대용량 정보처리시스템의 입출력장치(SCSI), ASIC 등을 주로 생산하고 있다. 콜로라도주 포트콜린즈와 스프링스, 캔사스주 위치타 등에 위치한 3곳의 공장에서 생산하는 물량은 6인치 웨이퍼로 한달 3만매.
생산물량에서는 우리나라 D램 생산량의 5%도 안되는 이 회사는 지난해 6억달러 매출에 6,300만달러의 경상이익을 냈다. 올해에는 7억달러 이상의 매출과 7,500만달러 상당의 이익을 목표로 하고 있다. 최근 가격이 급락하고 있는 메모리 반도체와는 상관없이 매년 20%에 가까운 초고속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이같은 성장의 배경에는 투자비의 85%를 인건비에 투입하는 등 그동안 집중육성해온 연구인력과 첨단기술력이 있는 것은 물론이다. 전체 종업원의 60%가 엔지니어 출신이다.
이 회사가 그동안 세계적으로 쌓아놓은 업적도 대단하다. 80년대 초 컴퓨터 시스템중 입출력장치의 기본형(프로토콜 칩)을 세계 최초로 개발한 것을 비롯 각종 칩 개발에 앞장서왔다. 현재는 세계 입출력장치 칩 시장의 3분의 1을 장악하고 있으며 디스크 드라이브에 들어가는 특정용도반도체부문에서는 세계 시장의 15%를 점유하고 있다. 주문자상표부착(OEM)방식으로 공급하고 있는 대형컴퓨터의 필수장치인 레이드시스템 생산량으로는 세계 3위를 차지하면서 비메모리 분야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같은 성과는 회사 분위기에서도 엿볼 수 있다. 공장이 아니라 마치 연구소같다. 대형 생산라인보다는 반도체를 설계하고 각종 성능을 시험하는 40여개의 실험실이 이어져 있다. 제품은 비교적 조그만 생산라인에서 만들어질 뿐이다.
현대전자가 이 회사에 욕심을 내게 된 것도 바로 이 회사가 보유하고 있는 첨단기술력과 노하우다. 메모리 분야는 어느정도 기술력을 확보했지만 여전히 걸음마 수준인 비메모리 분야를 강화, 「반쪽의 영광」에 그치는 한계를 극복하겠다는 것이다.
현대전자는 이를 위해 심비오스 로직을 별개의 독립조직으로 운영하면서 매달 평균 15명의 연구인력을 파견, 비메모리 분야에 관한 기술을 전수받고 있다. 연구진이 배운 심비오스 로직의 디자인설계기술을 현대전자가 보유하고 있는 대량생산기술과 접목시켜 세계 시장을 공략하겠다는 것이 현대전자의 전략이다.
현대전자는 이 회사의 인수로 비메모리 분야의 후발주자로서 겪어야 하는 막대한 투자비용과 많은 시행착오를 피할 수 있었다. 또 비메모리 분야에서 선진업체 문전을 기웃거리며 「기술 구걸」할 필요도 없게 됐다.
현대전자는 심비오스 로직이 보유하고 있는 391건의 특허를 십분 활용, 비메모리에 대한 중간진입을 통해 본격적인 사업진출에 나설 예정이다. 특히 심비오스 로직의 기술을 바탕으로 2000년까지 5억달러이상을 비메모리 분야에 투자, 세계 10대 비메모리 업체로 도약한다는 구상이다. 현재는 3%에 가까운 반도체중 비메모리의 비중이 그때에는 20%이상에 달할 것으로 보고 있다.<선년규 기자>선년규>
◎사활건 첨단기술 사냥 “해외기업을 사들여라”/최근 10년동안 굵직한 M&A 10여건
나라 안팎을 가리지 않는 첨단기술사냥이 활발하다.
기술력이 세계시장 제패의 근간이라는 사실이 현실로 나타나면서 국내 기업들이 기술력확보를 절대절명의 과제로 삼고있다. 기술력에서 뒤진다면 영원히 2류에 머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양적인 측면에서 초고속 성장을 거듭해온 우리나라가 일부 첨단기술분야에서는 여전히 후진국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같은 기술격차를 일거에 해결하기 위한 지름길은 해외기업의 인수합병(M&A)을 통한 기술흡수.
현지기업을 인수하면 그 회사가 그동안 쌓아온 기술력과 노하우를 단번에 습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외국 기술진이 개척해놓은 첨단 연구결과를 송두리째 들여와 국내기술과의 접목을 통한 상승효과도 거둘 수 있다. 세계시장에서 전쟁을 치르고 있는 기업으로서는 새로운 기술조류에 일분일초라도 빨리 적응해야 생존할 수 있어 M&A를 통한 기술흡수 전략을 선호하고 있는 것이다.
삼성그룹의 경우 교환기 전문회사인 미국IGT와 미국 패션업계의 새별로 떠오르고 있는 파멜라 데니스사 등 첨단부문의 회사를 인수, 교환기와 패션분야에서의 일천한 기술수준을 단숨에 국제수준으로 끌어올렸다. 삼성은 IGT 인수후 IGT의 노하우를 활용해 1년만에 초고속 통신핵심장비인 ATM교환기를 개발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세계경영을 표방하고 있는 대우는 94년 1월 자동차 엔지니어링 분야에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영국 워딩연구소를 인수, 일약 일류기술업체로 도약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했다. 국내 자동차회사가 연구개발에 대한 투자를 하지 않고 800여명의 연구인력을 확보하고 있는 외국의 연구소를 인수한다는데서 당시 부정적인 시각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대우자동차측이 예상했던 것처럼 기술인력 교류, 공동연구 등을 통해 차량관련 기술의 질적 전환이 이뤄졌다.
이밖에 현대전자가 미국 AT&T GIS사의 비메모리 부문을 인수한 것 등 첨단기술 흡수를 목적으로 한 M&A 사례는 최근 10년사이 굵직한 것만 십여건에 달하고 있다.
해외기술 사냥은 그러나 국내 기술공백을 일으킬 수 있다는 점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또 기술력을 믿고 인수했다가 인력이 모두 빠져나가는 바람에 껍데기만 남아 낭패를 보는 피해사례도 있다. 하지만 세계적인 기업들과 수평적 대결을 펼치고 초국적 기업으로 성공하기 위한 기술사냥은 기업의 사활과 직결된다는 점에서 더욱 활발해질 전망이다.<남대희 기자>남대희>
◎인터뷰/심비오스 로직 패터슨 사장/“설계·생산기술 결합으로 시너지효과”
『세계 일류가 아니면 살아 남을 수 없습니다. 심비오스 로직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회사도 일류가 되기 위해 현대전자로부터 생산기술 부문과 관련해 많은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또 경영의 추진력도 배우고 있습니다』
심비오스 로직의 짐 패터슨 사장은 현대전자와의 기술교류로 인한 시너지 효과를 강조했다. 그는 『심비오스 로직이 디자인설계면에서는 뛰어난 기술력을 갖추고 있지만 생산과 관련해서는 취약한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이라며 『현대전자의 인력과 함께 이를 보완하는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 기업들이 취약한 비메모리 분야에 뛰어드는 것은 비록 경쟁자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바람직한 현상』이라며 『비메모리분야에서는 무엇보다 인력을 집중 육성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제언했다.
그는 이어 『비메모리 반도체의 가치를 좌우하는 것은 바로 설계기술이기 때문』이라며 『우리회사의 경우 전체 인건비의 85%를 디자인쪽에 투입하고 있을 정도로 중요시하고 있다』고 밝혔다. 영업직원들도 일반 샐러리맨처럼 제품판매에만 열중하는 것이 아니라 전문지식을 갖추고 사전수주를 받는데 주력하고 있다.
그는 또 『심비오스 로직은 현대의 계열사이지만 독자경영체제를 갖춘 독립된 회사』라며 『현대전자와는 상호 호혜적인 동반관계를 유지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는 『올해 증시상황을 보고 미국증시에 상장할 계획』이라며 『상장을 계기로 세계 굴지의 기업으로 이끌 방침』이라고 말했다.
현재 미국 유수의 투자자문회사인 인베스트먼트은행에 따르면 심비오스 로직사의 가치는 12억∼15억달러. 2000년에는 16억달러 상당의 매출을 달성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는 이 기업을 더욱 크게 육성하겠다는 것이 패터슨사장의 의지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