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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끼기’만이 살길이다?(우리 방송 건강한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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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끼기’만이 살길이다?(우리 방송 건강한가:2)

입력
1997.01.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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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켜도 창피는 잠깐 인기만 얻는다면…/시간부족·아이디어 빈곤/시청률 강박관념에 도덕성과 창조성은 어느새 마비되고…창의력이 없다면 문화는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 방송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70년을 맞은 우리 방송가에는 「복제」라는 유령이 여전히 돌아다니고 있다. 방송 문화가 뿌리부터 썩어가고 있는 것이다.○범람하는 복제

TV속의 복제문화는 방송편성에서부터 보도물·다큐멘터리, 쇼·오락, 드라마 등 전 장르에 뿌리내리고 있다.

복제는 일본이나 미국 프로그램을 그대로 베끼거나 몇 개의 프로그램에서 부분 부분 따오고, 인기있는 국내 프로그램을 따라가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이루어진다.

드라마로는 「트렌디드라마」라는 장르를 개척한 MBC 「질투」 「사랑을 그대 품안에」 「호텔」, KBS 「슈팅」 등이 표절시비에 휘말렸다. 최근 시작한 SBS 주말극 「꿈의 궁전」도 표절의혹을 받고 있다.

쇼·코미디 등 오락프로그램은 복제의 범위와 정도가 훨씬 심각하다. 특히 80년대부터 본격화하기 시작, 프로그램의 포맷은 물론이고 출연자들의 말투, 심지어 농담까지 비슷하다는 것이 방송관계자들의 지적이다.

지난해 방송개발원이 내놓은 모니터보고서에 따르면 MBC 「폭소발명왕」은 일본 N―TV의 「발명장군 다운타운」과 유사하다. 공영방송인 KBS2 「퍼즐특급열차」의 「앞말잇기퍼즐」과 「역전낱말퍼즐」코너도 각각 N―TV의 「매지컬 두뇌파워」, 후지(부사)TV의 「평생교육위원회」와 유사한 것으로 드러났다. KBS2의 장수프로그램 「가족오락관」중 「방과 방사이」 「고요속의 외침」 등 코너도 「매지컬 두뇌파워」와 유사한 것으로 지적됐다.

○복제의 논리

복제의 역사는 우리 방송의 역사와 궤를 같이 할 만큼 고질적이다. 특히 일본방송은 방송환경이 국내보다 앞서있고 정서적으로 비슷해 집중적인 복제 대상이 됐다. 프로그램의 낙후성을 모방으로 극복해온 것이다. 한 PD는 『외국방송의 참신한 아이디어를 받아들이면 그것은 모방이 아니라 발전으로 이해되는 풍토』라고 말했다.

시간과 아이디어는 부족하고 시청률에 대한 강박관념에 시달리고 있는 제작자들이 표절의 유혹을 뿌리치기 어려운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제작진 스스로 고민하고 연구하는 자세가 부족하고 기획·제작을 위한 기간과 개발을 위한 방송사 투자가 적은 것도 큰 이유다. 또 프로그램에 대한 평가가 전적으로 시청률로만 좌우되는 풍토와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보려는 방송사의 천박한 경영논리 등도 복제를 부추긴다.

○복제 그 이후

복제는 PD의 창조성과 독자성을 차단하고, 윤리의식이나 책임의식마저 마비시키는 독버섯이다. 또 프로그램의 국제경쟁력도 약화시키고 우리 문화의 대외종속을 심화시키는 등 만만치 않은 후유증을 남긴다.

복제시비가 일어날 경우 제작진은 타격을 입는다. 하지만 그 뿐이다. 도덕성에만 흠집이 생길 뿐, 인기를 얻는다면 오히려 제작진은 갈채를 받기 마련이다.

복제에 대한 정확한 기준이나 외적인 구속력을 가진 제재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결국 수모는 순간이고, 인기는 영원한 셈이다.

93년 1월 일본 TBS는 KBS 「열전 달리는 일요일」이 자사 프로그램인 「풍운의 젠다성」을 모방했다며 항의공문과 함께 저작권료 3만달러를 요청했다. KBS는 표절이 아니라며 저작권료 지불을 거절했으나, 프로그램은 폐지했다.

영상물 개방시대를 맞아 이제 프로그램 복제는 새로운 무역분쟁으로 떠오를 것이다.

◎간부들 공공연히 표절조장·권유

『개편을 불과 3주 앞두고 담당 국장이 「검토해봐」라며 일본 프로그램을 녹화한 비디오 테이프를 던져주었다. 마땅한 아이디어도 없고, 시간도 모자라 결국 테이프에 매달릴 수 밖에 없었다. 부끄럽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한 쇼프로그램 PD의 고백이다. 프로그램 표절은 방송국에 더 이상 부끄러운 일도, 감출 일도 아니다. 특히 시청률에 민감할 수 밖에 없는 중간간부들은 일선 PD들에게 표절을 공공연하게 조장하고, 권유하기도 한다.

한 드라마 PD의 말. 『일본의 인기 드라마를 장면 하나 하나까지 베낀 동료가 있었다. 하지만 의외로 반응이 좋지 않았다. 술자리에서 그 친구는 하소연을 했다. 「일본에서는 떴는데, 왜 이럴까」』

봄·가을 개편을 앞두고 방송의 제작관련자들은 프로그램 개발이나 기획이라는 명분으로 간혹 해외출장에 나선다. 이들의 가방 속에 필수적으로 들어있는 것이 바로 녹화용 비디오 테이프. 출장이 끝날 쯤이면 비디오 테이프는 하나도 남김없이 녹화되기 마련이다.

단골 복제 대상인 일본 프로그램의 경우 각 방송사가 별도의 모니터 요원을 고용하기도 한다. 유학생이나 현지 동포들이 「물건」이 될 만한 프로그램을 복사하고 본사로 보내주는 것이다.

10년간 일본에서 유학생활을 하고 지난해말 귀국한 이모(34)씨는 『한 방송사 특파원 사무실에서 우연하게 모니터 요원을 만난 적이 있다. 그가 하는 일을 알게된 후 알 수 없는 수치심과 분노에 사로잡혔다』고 고백한다.

방송가 주변에서 남몰래 뛰고 있는 「복제를 만드는 사람들」 덕분으로 우리도 2∼3개월만 기다리면 세계의 인기 프로그램을 안방에서 볼 수 있게 됐다.<박천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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