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분위기… 바겐세일… 문화센터…/저마다 가는 이유는 달라도 백화점은 이제 쇼핑만을 위해 존재하진 않는다/단순한 ‘소비욕망의 해방구’서 문화·유행 전파의 ‘권력’으로/점차 그 영향력을 더해가는 우리시대의 ‘거대한 인공낙원’전업주부 김문숙(34·서울 노원구 상계동)씨는 10일 남편을 출근시키고 다섯살배기 아이까지 유치원에 보내고 난 후, 자신의 「출근」을 준비했다. 늦는다고 뭐라는 사람은 없지만 셔틀버스 배차시간에 맞추자면 서둘러야 한다. 전화를 걸어 시누이에게 아이를 부탁하고, 지갑 속의 신용카드도 다시 한번 체크했다.
바쁜 걸음을 재촉해 셔틀버스 정류장에 도착했다. 정류장은 동네 주부들로 벌써 만원이다. 안부인사도 나누는 둥 마는 둥, 버스를 기다리는 그의 마음은 몹시 급하다. 며칠을 신문 광고전단을 비교해가며 벼른 끝에 길을 나선 이날은 시내 대형 백화점들이 일제히 정기 바겐세일을 시작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값싸기야 할인점이 좋고, 편하기로는 동네 슈퍼마켓이나 재래시장이 그만이지만, 김씨는 짜증스런 교통혼잡과 발디딜 틈조차 없는 아비규환을 감수해 가며 때마다 백화점 「바겐세일 전쟁」을 치룬다. 이날의 「전리품」은 큰 맘먹고 장만한 무스탕 한 벌과 아이의 재고 옷가지 몇 벌, 남편의 셔츠와 넥타이 몇 개, 굴비 한 두름. 돌아오는 길에 충동적으로 구매한 압력밥솥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김씨는 이번 바겐세일 기간에 백화점 5곳을 돌아다녔다. 짐짝 취급 받으며 사서 고생하는 이 짓을 그만두자고 때마다 입술을 깨물지만 번번이 그때 뿐이다. 나만 손해보는 게 아닐까 하는 조바심과, 싼 가격에 좋은 물건을 살 수 있다는 유혹이 너무도 크기 때문이다. 백화점을 한바퀴 순례하고 나니 일단 마음이 놓인다.
다른 전업주부 박미경(38·서울 송파구 잠실동)씨. 남편 말을 빌리면 그는 백화점에서 「사는」여자다. 3년째 가까운 백화점 문화센터의 에어로빅과 노래교실, 공예, 홈패션, 데쿠파주 과정을 두루 거쳤다. 토요일 하오에는 아이 둘을 글짓기 교실과 과학교실에 데리고 간다. 동네 슈퍼마켓보다 백화점 지하 슈퍼를 이용한다. 식료품이나 육류가 신선하기 때문이다. 한가한 낮시간에는 가끔 이웃 주부들과 백화점내 영화관에 간다. 동창과의 약속도 백화점 식당가에서 한다. 그는 일주일에 평균 4차례 백화점에 다닌다.
도시인들은 왜 백화점에 가는가. 백화점은 무엇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이는가. 백화점에는 과연 모든 것이 존재하는가.
신경정신과 전문의 이나미씨는 『도박충동이나 TV중독이 하나의 질병이듯, 쇼핑 혹은 백화점 중독증 또한 충동조절장애에서 오는 질병』이라고 말한다.
「백화점 중독증」은 이제 희귀질환이 아니다. 평소에는 잠복해 있다가 바겐세일 때면 도심의 교통이 아예 마비될 정도로 전염성 강한 집단증후군이다.
문화평론가 손동수씨는 나아가 『백화점의 사회문화적 역할과 기능을 좀더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욕구의 사회적 출구와 자기 실현의 기회가 적은 여성들, 특히 전업주부들에게 백화점은 거의 유일하게 허용된 「열린」 공간이라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철마다 벌어지는 바겐세일 소동은 병증이라기보다는 하나의 거대한 「소비카니발」이다. 이 떠들썩한 카니발을 통해 평소 「남편에게는 재떨이가 되고 아이들에게는 밥이 되는」 주부들은 억눌린 욕구와 욕망을 맘껏 발산하고 서로를 통해 자기정체성을 재확인한다는 것이다.
백화점은 이제 중산층 주부만의 쇼핑장소가 아니다. 거의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백화점에서 쇼핑을 하고 문화를 「수강」하며 시간을 보낸다. 백화점은 온갖 기획전과 세일, 각종 이벤트를 통해 연중 내내 사람들을 유혹한다.
거기에는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독특한 메커니즘이 있다. 적당하게 고급스럽고 잘만 찾으면 남대문 시장보다 싼 물건, 치밀하게 계획된 공간구성, 수준 높은 서비스, 소비욕을 자극하는 디스플레이와 온갖 부대편의시설. 쇼핑을 하고 밥도 먹고 문화도 배울 수도 있는 곳.
여름에는 가장 시원하고, 겨울에는 가장 따뜻한 곳이 바로 백화점 입구다. 그것은 그저 거기 있을 뿐인 입구가 그 안에 들어가면 뭔가 다른 세상이 펼쳐질 것만 같은 무의식적 효과를 가진다.
시끄러운 바깥 세상과는 완벽하게 차단돼 모든 것이 가장 쾌적하게 유지, 조절되는 백화점은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환상공간」이다. 또 첨단의 유행을 창출하고, 유포하는 패션과 트렌드의 발원지이면서, 동시대 사람들의 욕구를 가장 예민하게 반영하고 확대재생산하는 「거대권력」이다. 이 밀폐된 공간 안에서 사람들은 물건을 사지만 그 물건에 딸린 이미지와 환상도 쇼핑한다.
백화점에서 빼 놓을 수 없는 공간. 바로 문화센터다. 거의 모든 백화점이 상시 운영하는 문화센터는 한 학기당 강좌수만 150∼200여 개에 수강인원은 3,000∼5,000명을 헤아린다. 입회비 3만∼5만원 정도에 월수강료가 2만 원 선으로 비용도 저렴한 편이다.
여기에다 백화점이 자체 운영하는 미술관, 공연장, 이벤트홀 등 각종 문화공간까지 합치면 백화점은 그 자체로 하나의 복합문화공간이자 도시문화의 핵심거점이라고 부를 만하다. 특히 신도시의 경우는 더하다. 신도시는 대개 백화점을 중심으로 상권과 지역문화가 형성된다. 살림 때문에 먼 외출을 꺼리는 사람들을 위해 백화점은 앞다투어 문화시설을 설치한다.
그러나 이는 결국 세련된 상술에 불과한 게 아니냐는 곱지 않은 시선도 있다. 롯데백화점 홍보실 황영근 계장은 이에 대해 부분적으로 긍정한다. 그러면서 그는 『그 많은 공공기관의 각종 문화강좌·재교육 프로그램은 무료인데도 사람이 몰리지 않는 이유를 한번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한 명의 고객이라도 더 잡아야 하기 때문에 그만큼 신경을 쓴다. 사회와 국가가 떠맡아야 할 책임의 상당 부분을 이윤창출을 최대 모토로 삼는 백화점이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고 말했다.
백화점 협회 박명옥씨에 따르면 서울·경기지역에서만 대략 8만∼10만 명 정도가 문화센터를 이용한다. 백화점은 더이상 소비의 천국만이 아니다. 부인할 수 없는 엄청난 사회문화적 기능을 갖고 현대 도시인의 생활을 알게모르게 규율하고 있다.<황동일 기자>황동일>
◎‘백화점은 하나의 극장무대’/상품·조명 등 치밀한 디스플레이로 구매욕 자극
백화점에서는 감성을 판다. 「이미지 소비의 시대」에 백화점은 이미지를 통해 감성을 세일한다. 「아이 쇼핑」은 이미지를 소비하는 가장 구체적인 행위이다. 감성을 파는 것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누군가는 「생활과학」 이라고까지 말한다. 백화점 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은 감성을 팔기 위해 치밀하게 기획된 것이다. 고객들의 무의식적인 움직임까지 미리 계산되고, 반영된다.
곳곳에 부착된 반사유리를 이용한 나르시시즘 효과, 조명 등을 이용한 상품 이미지의 극대화 등은 뭔가 질적으로 새로운 공간에 들어서 있다는 생각에 빠져들게 유도한다.
백화점 안에 들어서면 먼저 눈부신 밝은 조명과 마주하게 된다. 자연광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바깥 세계와 단절된 화려한 인공 조명의 공간에서 사람들은 안정감과 쾌적함을 느낀다.
어디에나 거울이 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벽면과 매장 곳곳은 물론이고, 엘리베이터의 벽면과 철물을 이용한 구조물 등도 모두 거울처럼 비치도록 고안되었다. 「보여주고, 보여지는 것」이 백화점 공간 연출의 기본임을 알 수 있다.
『백화점을 흔히 극장에 비유합니다. 하나의 무대 공간으로 생각하고, 공간연출을 하는 거죠. 매장 안에 들어선 순간, 소비자들은 발로 걷는 것이 아닙니다. 무대를 바라보듯 눈으로 걷게 됩니다』 롯데 백화점 디스플레이팀 과장 이경형씨는 말한다. 눈으로 걷는 소비자들의 발길을 붙잡기 위해 공간 계획과 매장 배치, 공간 연출이 중요할 수 밖에 없다.
공간 계획의 방법은 크게 샤워식과 분수식으로 나눠진다. 샤워식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내려오면서 공간을 연출하는 방식이라면, 분수식은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며 구매를 유도하는 방식이다. 우리나라 백화점은 대개 분수식을 택하고 있다. 매장 안으로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여 위층으로 유도하기 위해 1층에 잡화 상품 매장을 두는 것이 한 예이다. 예전에 숙녀복이었던 2층 매장이 영캐주얼 매장으로 바뀐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볼 수 있다. 무료로 제공되는 각종 이벤트 행사장을 맨 위층에 두는 것은 반대로 아래로 내려오면서 물건을 구매하도록 유도하는 이른바 「폭포효과」를 감안한 동선관리이다.
일단 백화점에 들어온 소비자를 얼마나 매장 안에 오래 머물도록 하느냐는 매출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매출액과 백화점내 체류시간의 상관관계를 분석한 한 통계에 따르면 구매욕구는 시간에 비례하고 있다. 소비자들의 동선을 고려해서 매장을 배치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들어가기 쉽고, 보기 쉽고, 선택하기 쉬운 곳으로 자연히 발길이 끌리기 마련이다.
일반적으로 오른손잡이가 많은 우리나라 사람들은 왼발을 먼저 움직이기 때문에 매장에 들어서면 오른쪽 방향으로 도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중요한 매장은 출입구의 오른쪽에 있는 경우가 많다.
동선 외에 소비자들의 시선을 자극시켜 상품이나 브랜드가 있는 곳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이미지 숍」을 이용하기도 한다. 이미지 숍을 연출하는 방법은 예전에는 여러가지 장식이나 장치를 많이 사용하였는데 최근의 추세는 상품 연출 그 자체에 중점을 두고 있다.<김미경 기자>김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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