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기에 썩 달갑지 않은 장면이 최근 명동성당 앞에서 연출됐다. 붉은 머리띠를 두른 노조대표들이 파란 눈의 해외노동단체 대표들과 합동 기자회견을 갖는 모습이었다. 우리의 인권과 자유의 많은 부분을 외부에 의존해야 했던 군사정권시대에 종종 보던 장면이었다.물론 현재의 상황은 당시와 크게 다르다. 절대적인 인권의 문제가 아니라 선진국 수준의 노동권을 보장하라는 압력이기 때문이다. 쟁점도 다르다. 현재의 쟁점은 정리해고제나 변형근로제지만 그들은 복수노조 허용과 교원의 노동권보장 등 노동기본권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나 파란 눈의 「감시자」들이 농성장에 합류한 것만으로도 세월이 역류한듯한 당혹감을 느끼게 된다.
김영삼 대통령은 94년 11월 「세계화」를 집권 후반기 국정지표로 내세웠다. 당시 모두가 그 개념을 파악하지 못해 우왕좌왕했다. 이때 정부는 「세계화는 인류 보편의 가치와 공동선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명쾌하게 설명해 주었다. 높은 수준의 도덕성을 내포한 개념이었다. 한승수 경제부총리는 지난해 11월 본지에 기고한 글에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개방적 시장경제체제, 다원적 민주주의제도, 그리고 인권존중의 가치를 공동으로 나누는 국가들의 모임』이라고 했다. 그의 설명대로라면 OECD가입은 「세계화」의 화려한 결실인 셈이다.
그러나 OECD가입 후에 대비한다는 새 노동법은 「날치기 통과」라는 파행으로 총파업을 불러왔다. 세계화시대에 걸맞지 않는 구태였다. 교통수단과 통신 금융이 마비될 지 모른다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그런데도 김대통령은 『파업은 시대상황과 노동관계법에 대한 이해부족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의견이 다른 상대를 설득해 합의에 이르도록 하는 것이 민주적 절차의 핵심이며 그 바탕이 없이는 세계화에 도달할 수 없다. 법안의 날치기 통과, 타협은 필요없다는 아집과 독선, 이런 것들은 분명 「세계화」에 역행하는 구태이다. 「세계화」는 탐나는 미래이지만 노력하고 감내하는 과정을 필요로 한다. 최근의 사태는 과정의 「쓴 맛」은 외면한 채 결실만을 탐낸 결과일 수도 있다. 「세계화」를 위한 고통분담에는 누구도 예외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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