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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의 지평과 그 너머(문화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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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의 지평과 그 너머(문화칼럼)

입력
1997.01.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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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을 하고 말을 하는 일은 현안의 문제를 보다 큰 생각의 틀에 비추어 정당화하는 작업이다. 이 틀은 우주적인 것일 수도 있고, 역사의 큰 흐름에 대한 것일 수도 있고, 또 이 안에서의 인간의 운명에 대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대체로 사회적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토론은 오늘의 사회 현실에 대한 일단의 이해를 바탕의 틀로 한다. 좁다면 좁다고 할 이 테두리 안에서 토론이 이루어지는 것은 불가피한 일일 것이다. 그렇기는 하나, 이 테두리는 점점 더 좁아져 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 사회의 생각과 행동은 너무나 목전의 현실에 대한 편파적 감각에 의하여 지배되고, 이 현실은 완전히 경제의 총량적인 움직임으로 정해진다고 주장된다. 그리고 날로 강화하는 경제 논리의 옥죄임 속에서 다른 모든 생각은 생각의 지평 밖으로 밀려난다. 이것은 문화 활동, 신문의 편집 등과 같은 작은 일에서도 그러하지만, 보다 큰 사회 정치의 정책의 면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노동법과 안기부법 개정의 정당화에 동원되는 것도 경제 논리이다. 참으로 여기에 우리 생각과 행동이 한정되어야 하는 것인가. 우리 사회의 경제 논리에 큰 격려가 되는 것은 오늘날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정책을 움직이고 있는 것이 같은 논리라는 사실이다. 지금 이들 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은, 30년대 이후에 오랜 세월에 거쳐 구축되었던 사회정의와 분배와 참여 제도의 해체이다. 다른 요인 이외에 이러한 역사의 해체에 이념적 바탕이 되는 것은 사회주의 체제의 붕괴와 자본주의의 승리이다. 이제 자본주의 체제는 유일한 것일 수 밖에 없다. 그 논리를 따르는 외에 다른 무엇을 원할 수 있겠는가, 오늘날 자본주의는 이렇게 오만하게 묻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간 더러, 자본주의가 살아 남아 온 것은 자본주의의 논리를 철저하게 실천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논리의 과격성을 사회적 요구에 의하여 계속 수정해 온 때문이라는 지적이 있었다. 오늘날 이것은 잊혀진 주장이 되었다. 또 잊혀진 것은 혁명적 사회주의가 외계에서 나타난 것이 아니라 바로 자본 체제 안에서 생긴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유일한 체제 안에서도, 체제의 과도한 자만은 스스로 안에 타자와 다자들의 새로운 선택을 만들어냈다는 것도 잊히게 되었다.오늘날 자본주의 사회를 하나로 묶어놓고 있는 것은 물질 생활의 풍요이다. 성공한 자본주의는 사회 성원의 모두가 이 풍요의 효과를 다소간에 향수할 수 있게 하였다. 그러나 외곬수의 경제 논리 속에서 다수의 사람에게 이 향수의 폭-특히 사회복지라는 이름의 최소한도 선에서의 향수는 점점 좁아져 간다. 사회적 혜택을 이미 확보해 놓은 선진국에서보다는, 후발 사회에서 이 향수는 보다 빠르게 좁혀지고 증발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문제는 단순히 자본주의 성패가 아니라 그것이 좋은 사회의 실현과 별개의 것일 수 있다는 것이다.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에 있어서 사회정책의 후퇴는 아시아 여러 사회의 경제 발전으로 인한 세계 경제 권력의 이동에 관계되어있다. 아시아의 발전이 단순히 경제 패권의 이동 이상의 역사적 의미를 가지려면 그것은 인간적 경제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라야 할 것이다. 우리가 보다 나은 사회를 원한다면, 우리의 생각과 행동은 경제 논리의 테두리를 넘어가야 한다. 사람의 삶에는 그것을 넘어가는 다른 지평이 있고, 인간의 긴 장래는 이 지평에서 온다.<김우창 고려대 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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