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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아스 라인/관조적 페미니즘,그 조용한 웅변(영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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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아스 라인/관조적 페미니즘,그 조용한 웅변(영화읽기)

입력
1997.01.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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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 얘기처럼 들려주는 안토니아 가계 4대 통해/남성지배 이데올로기 대신 여성성이 조율하는 세상 제시턱없는 적개심과 분노, 물리적 강인함, 위대한 승리의 도취감, 왜곡되고 정형화한(폭력적이거나 성차별적) 남성상과 그에 따른 남성 무용론.

「페미니즘」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들이다. 많은 영화가 관객들에게 페미니즘을 이렇게 느끼도록 강요했다. 그 때마다 페미니즘 영화는 늘 「절반의 실패」였다.

「안토니아스 라인」(11일 개봉)도 분명 페미니즘 영화이다. 여성들이 아내로, 어머니로서가 아니라 독립된 인격체로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노골적이지 않다. 웅변하듯 단상을 주먹으로 치는 흥분도 없다.

한적한 시골에 사는 여인들의 따뜻하고 소박한 삶을 섬세하고 재치있게 관조한다. 그들의 세월에 실린 크고 작은 사건들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배타적인 남성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한 혐오감과, 그 대안으로 조화롭고 생명력 넘치는 여성성이 조율하는 세상에 대한 기대가 생긴다.

「안토니아스 라인」이 아름다운 것도, 마린 고리스 감독이 아카데미에서 극찬을 받은 것도 이 때문이다.

영화는 4대에 걸친 안토니아의 가계를 이웃 얘기처럼 들려준다. 죽음을 앞둔 노파 안토니아(빌레케 반 아메루이)가 지난 50년을 회상하는 삶은 여유롭다. 어머니의 죽음으로 중년에 열여섯살 난 딸 다니엘(엘스 도터만)과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이웃과 가족을 지극히 주체적으로 받아들인다.

쇼펜하우어의 염세론에 젖어사는 「굽은 손」(밀 세게스)은 유일한 친구이자 딸과 손녀의 스승으로, 아들 다섯을 둔 홀아비 바스(얀 데클레어)는 연인으로 대한다.

가부장적 지주인 단을 무시하고 위선적인 성당 신부를 비웃지만 보름달만 뜨면 늑대처럼 울부짖는 미친 여자와 그를 사랑하는 신교도 청년에게는 연민을 가진다.

그것을 보며 자라는 다니엘은 단의 장남인 피트가 그의 누이동생 디디를 성폭행하자 갈쿠리로 찌른다.

화가지망생인 다니엘이 남편없이 아이를 갖고 싶어하자 안토니아는 도시로 나가 남자를 구해 주고, 이들 사이에서 천재 소녀 테레사(벨르 반 오베르프)가 태어난다.

성장한 테레사가 돌아온 피트의 앙심으로 폭행을 당하자 안토니아는 총 대신 저주로 복수한다. 다니엘은 테레사의 여선생과 동성 연인이 된다.

그리고 안토니아는 모든 이웃들의 죽음을 지켜보면서 『어쩔 수 없어, 인생은 이런 거야』라고 말하고는 눈을 감는다. 결국은 넓은 가슴으로 인간적이지 못한 남성까지 감싸는 자세와 언뜻 모계사회로의 회귀를 갈망하는 듯한 영화. 때문에 「안토니아스 라인」은 여성들만 보고 자위하는 그런 페미니즘 영화에 머물지 않는다.<이대현 기자>

▲양윤모(영화평론가)­들꽃의 향기처럼 피어나는 자유롭고 너그러운 인생은 아름답다.(★★★★)

▲전찬일(〃)­재미와 감동, 생동감 넘치는 인물 그리고 성숙한 페미니즘.(★★★★)

▲서울지역 대학생 위원회­안토니아스 라인에서 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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