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없이 이어진 길/쉬고싶어도 쉬지못하는 나그네의 운명「계해년(1983년)이 저물던 12월 중순 해질 무렵에 있었던 일이다. 물치 삼거리에 잠깐 선 속초발 삼척행 일반버스에서 몇 사람이 내렸다」.
이제하의 소설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는 이렇게 시작된다. 삼거리에 내린 이들은 산행길인 듯 보이는 사내 서넛과 그리고 「골덴 점퍼에 옛 시골 면서기의 그것 같은 낡은 가방을 늘어뜨린」 중년의 사내. 서울에서 말단 공무원 생활을 하고 있는 그는 「허섭스레기와 함께 처박아둔 채 근 삼 년이나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던」 아내의 유골을 뿌릴 곳을 찾아 무작정 길을 떠나온 참이다.
그 날 사내는 밥집에 들었다 휴전선 너머 월산으로 가겠다는 중풍 걸린 노인네와 그의 유담보 노릇을 하는 간호사 일행을 만난다. 그들은 휴전선 근처까지라도 자신들을 데려다 줄 사람을 구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밤늦게 사내는 낮에 버스에서 함께 내린 낯선 사내들을 여관에서 만나 화투를 치다 여관에 불려온 여자 하나가 심장마비로 죽는 바람에 밥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간호사 일행이 원통으로 떠났다는 소리를 듣게 된다.
다음날 그는 경포, 양양을 거쳐 「경우에 따라서는 사나흘을 산통 깨고 결근해야 할지도 모르는 원통행」을 「께름칙한 이런 기분으로는 도저히 그냥 돌아갈 수 없어」 대설주의보가 내린 길로 나선다. 원통에서 그는 노인네와 간호사를 찾아 서울서 뒤쫓아온 사내 둘을 만나 그들이 몰고 온 차를 타고 다시 인제로 향한다. 그리고 인제 초입의 한 여관에서 간호사 일행을 겨우 찾아낸다. 노인은 곧 서울서 온 사내들이 데려가고 마침내 간호사와 사내만이 길 위에 남게 된다. 간호사는 사내에게 『당신이 올 줄 미리 알고 있었다』면서 옛날 면목동에 가서 들은 점쟁이 말을 한다. 『서른엔 물가에서 관을 셋 짊어진 사람을 반드시 만난다. 그 사람이 전생의 네 남편이다. 그래서 사실은 물치에서 사람을 기다렸노라』고.
사내는 서울에 올라가 새 살림을 차리기로 하고 이튿날, 여량 아우라지강에 들러 아버지를 만나고 뒤따라오겠다는 여자와 나루터에서 헤어진다. 나루터에서는 오구굿이 한창이다. 한데 배가 막 떠나려고 하는 순간에 사내를 배웅하던 간호사에게 무당이 다가와 부채를 쥐어준다. 이 소설의 마지막 장면, 곧 여자에게 신이 내리는 부분에 오면 여지없이 마음에 살이 돋는다.
「배에서 뛰쳐나가려고 그가 마악 한 발을 내디뎠을 때, 여자의 눈빛이 변했다. 여자는 한 손으로 옷을 잡아뜯고, 다른 손으로 부채를 흔들면서 어느덧 춤추는 걸음이 되었다…(중략)… 눈 덮인 맞은편 산봉 위로 거대한 손바닥 하나가 걸렸다」
이 소설을 처음 읽은 건 내가 공주에 있는 한 암자에 묵고 있던 86년 여름이었다. 맨발에 흰 고무신을 신고 공주 시내에 있는 한 찻집에 내려갔다가 우연히 벽 구석에 꽂혀 있는 책을 빼들게 되었던 것이다. 나 또한 떠도는 자로 길 위에 있을 때였다. 그로부터 십년의 세월이 흘렀건만, 지금 다시 읽어도, 늘 길 떠나고자 하는 마음에 겹쳐 울리는 감동은 여전히 새롭다.
이 작품 속의 길 떠남엔 분단과 이산, 샤머니즘적 색채의 집단무의식, 저 실체가 불분명한 운명의 을씨년스러운 그림자들, 그 사이에 아무 때고 침입하는 우연과 필연의 송곳니가 살처럼 끼어 서로 맞물려 있다. 그래서 닿아 머무를 끝이 대체 막연하고 더군다나 휴전선이라는 단어가 상징하듯 현실적으로 회향이 불가능한 곳을 향해 다만 끝간데 없이 이어져 있을 뿐이다. 한데다, 어디 길가에라도 지쳐 잠시 주저앉을 만하면 여지없이 저 하늘무당인 우주신이 그 존재를 삽시에 거둬들여 다시 나그네로 길 위에다 내동댕이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들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 게 아니라 아예 쉬지 못하도록 운명지워진 존재들인 모양이다.<윤대녕>윤대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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