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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년을 거부해야할 까닭/박승평 수석논설위원(메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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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년을 거부해야할 까닭/박승평 수석논설위원(메아리)

입력
1996.12.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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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국보 제274호 사건은 이제 기억하는 사람조차 드물다. 충무공의 후예임을 자랑해 온 우리 해군이 가짜 거북선총통을 진짜로 둔갑시켜 국보로 지정케 하는 등 민족정기를 훼손하고 해군의 전통에 먹칠을 한 어마어마한 사건이었다.필자도 불과 6개월전 바로 본란에서 「수루의 깊은 시름」이란 제목으로 민족의 성웅 충무공을 두번 죽인 것과 다름없는 그 사건의 면목없음과 송구스러움을 통탄한 바 있었다.

그 사건이 그후 어떻게 처리되었는가. 놀라웁게도 가짜 국보사건의 두 주범은 얼마전 국방부고등군법회의와 광주지법순천지원에서 각각 1년 징역에 2년과 3년씩의 집행유예를 선고받아 이미 풀려나 있다.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사이 그 어마어마한 사건도 뱀꼬리처럼 사라져 버린 것이다.

불과 6개월전의 사건인데도 이처럼 쉽게 망각되고 관심권에서 사라져 버리는 가증스러울 정도의 삭막한 현실에서 뭘 또 더 잊고 세월에 흘려보내겠다고 망년회가 줄을 잇고 있는지 정말 모르겠다.

세모의 정국을 강타하고 있는 안기부법개정안 등의 날치기통과문제도 우리사회의 극심한 건망증과 결코 무관치가 않다. 93년 12월 안기부법이 개정됐을 당시부터 「분단상황을 외면한 정치흥정」이란 반발이 없지 않았다. 또한 야당과 대좌하고 있는 여당의 간사도 모르게 안기부 수사권에 대한 양보가 고위층에서 먼저 이뤄져 「나만 병신이 됐다」는 여당간사의 볼멘소리도 터져나왔었다.

당시의 사려깊지 못했던 권부의 부족한 통찰력이 이인모노인 북송허용, 쌀보내기파동, 한총련사태와 대북정책의 혼란스러움에다 이번의 날치기로 쉴새없이 이어졌다고 지적해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잠수함공비침투로 우리의 문민안보실상이 여지없이 드러나 여·야합의끝에 국방비증액으로 이어진 것은 차라리 전화위복이라 치자. 하지만 개정노동법 기습통과파문이 총파업 등의 산업평화부재로 이어지게 된건 또 어찌할 것인가.

우리의 96년을 시종한 화두는 「경제침몰」이었다. 사상 처음으로 200억달러를 넘어선 경상수지적자에 1,000억달러를 초과해버린 외채의 눈덩이 앞에 문민정부의 「신경제」는 어디로 갔는지 눈을 씻고도 찾을 길이 없다. 430억달러이던 총외채가 불과 4년만에 곱절이 훨씬 넘었다면서도 어떻게 화기애애한 「송년만찬」이 가능할 수 있는지가 궁금해 지는 것이다.

우성에 이어 한해동안에 건영과 동신 등 큰 건설업체와 함께 중소기업도산 사태가 헤아릴 수 없을 지경인데, 우리 정치판의 「산술놀이」란 유치찬란하기 그지없다. 「방빼」 「책상 빼」라는 기막힌 유행어속에 마냥 쓰라린 명퇴자의 한과 울분이 지금 거리에 넘쳐 흐르고 있는데 우리 정치권이 하는 일이란 게 뭔가. 대권소리 아니면 DJP같은 어설픈 「합종연횡」에다 국회의원이나 자치단체장 빼내 먹기가 고작이다. 거기에 한술 더 떠 상수원오염시키기와 그린벨트 풀어 주기에마저 우리 정치가 앞장서고 있는 것이다.

개혁이 물건너 가고 있음은 당초의 엄포와 달리 선거사범들에 대해 눈감아 버리는 것으로 이미 확연히 드러난 바 있었다.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 연좌제처벌조항마저 빼기로 여야가 합의한 우리 정치권인 것이다.

앞서 인도에서 발생했던 대형여객기의 공중충돌사고는 「언어불통」이 그 원인임이 드러난바 있다. 관제탑과 조종사간에 말이 통하지 않았으니 눈감고 귀막은채 운항한 꼴이어서 대형참사를 빚을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그같은 「언어불통」사태가 지금 우리 사회의 곳곳에도 도사리고 있는 것만 같다. 온갖 번듯한 수사는 늘어놓으면서도 참뜻이 소통되지 않고 있다면 그게 바로 「불통」 사태가 아니고 무엇인가. 정치불통·경제불통·안보불통·개혁불통·통일정책불통에다 가짜 국보사건범인조차 쉽게 풀어주는 민족정기지키기불통마저 겹친 1996년을 뉘라서 망년의 한잔술이나 송년만찬으로 쉽게 잊어버리자고 감히 말을 할 수가 있겠는가.

위기야말로 새로운 시작의 더할나위없는 기회라고 말들을 한다. 그런 의미에서 96년의 못다한 일들을 추적해 끝까지 따지고 챙겨야겠다는 결의가 오히려 중요하다. 그게 바로 1996년을 망년으로 흘려보낼 수 없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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