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수립된 후 이승만 대통령 만큼 외교를 중요시한 통치자는 없었을 것이다. 주로 미국의 원조에서 발생하는 소위 「대충자금」으로 정부살림을 꾸려 가야 할 정도로 가난했던 시절이다. 냉전의 지정학적 요인이라고는 하지만 그나마 38선 이남의 좁은 국토에서 정부수립을 선언할 수밖에 없었던 분단 한국, 변변한 지하자원도 없이 그저 미국의 무상공여에 의한 잉여농산물로 허기를 달래야 했던 시절의 얘기다.외교의 달인이라는 이 노통치자는 외화의 빈곤을 이유로 해외에 파견하는 외교관들을 독신으로 내보냈다. 따라서 아내와 자식들은 남편과 아버지가 해외근무하는 동안은 본의 아니게 본국에 인질 아닌 인질의 상태로 남았어야 했다. 이렇게 독신으로 외국에 나간 우리들의 선각자 외교관들 가운데는 본국에 남아 있는 촌스런(?) 조강지처를 버리고 외국에서 만난 주로 유학생출신 신여성과 새 살림을 차린 사람도 더러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태평양과 대서양을 횡단하는 주 몇편 안되는 비행기에 몸을 싣고 낯선 근무지를 오가는 비행기 속에서도 스튜어디스가 권하는 식사나 음료가 유료인 줄 알고 「속이 불편하다」는 구실로 수십시간을 굶고 간 사람이 허다했다는 얘기는 지금으로 보면 아득한 옛날의 얘기다.
경제개발덕으로 생활이 좀 나아졌다 싶으니까 북한과의 소모적인 세 싸움 때문에 우리의 외교관들은 단 하루도 영일이 없었다. 이른바 비동맹외교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우리 외교관들이 세계의 오지들을 구석구석 누벼야 했다. 세 싸움에 밀린 북한이 테러극까지 자행하는 바람에 아웅산 묘소에서 17명의 외교사절이 떼죽음을 당하기도 했다.
특히 북한과의 대결양상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지난 10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최덕근 영사가 의문의 피살극을 당한데 이어 이번에는 페루의 일본대사관 리셉션에 갔던 우리 이원영 대사가 무장 반군테러범들에게 인질로 잡혀 고난을 당하다 풀려나기도 했다. 외교관 수난시대는 끝이 없는가.<논설위원실에서>논설위원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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