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청찢는 폭음·총성 “엎드려…”/신분따라 20∼30명씩 분리수용/빵 한개로 5명이 나눠먹어 허기… 김치 갖다주기도이원영 주 페루 대사는 21일 일본대사관에서 반군게릴라에 억류됐던 70여시간의 「악몽의 체험」을 다음과 같이 상기했다.
일왕 생일 축하파티가 열렸던 17일 일본대사관 관저에 도착한 것은 하오 8시께였다. 각국 외교관 및 페루 정계인사들과 인사 하느라 한창 분주할 무렵, 갑자기 관저밖에서 귀청을 찢는 듯한 폭음이 울려퍼졌다. 연회장은 순간 혼란과 공포에 사로잡힌 아수라장으로 돌변했다. 이후 총성이 잇따르며 수십명의 무장 괴한들이 연회장으로 뛰어들었다.
『엎드려, 고개를 들면 머리를 날려버린다』 테러범들의 목소리가 매우 위압적이었다. 수백명의 연회 참석자들은 기겁을 한 채 테러범들의 지시에 따랐다.
10여분이 지났을까. 테러범들은 대사관저를 완전 장악했다고 판단, 사람들을 일어나게 한뒤 장내 정리에 들어갔다. 부녀자와 노약자, 외국 외교관, 페루정치인들을 분류했다. 수시간이 채 못돼 노약자를 중심으로 일부 사람들을 풀어줬다. 알베르토 후지모리 페루대통령의 모친과 여동생도 함께 석방됐는데 인질범들은 이같은 사실을 모르고 풀어줬다.
나머지 수백명의 인질들에게는 각각의 성명과 신분을 메모지에 적어 내도록 했다. 이어 관저 1·2층 20여개의 방에 25∼30명씩이 분리수용됐다.
인질범들은 예상외로 상당한 교육을 받은 것 같았다. 대부분이 20∼30대 남자였지만 여성대원도 2명가량 포함돼 있었다. 어떤 남자 게릴라는 김치를 가져와 먹겠느냐고 말할 정도로 여유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긴장해서 음식물이 넘어가지 않았다. 음식 사정도 좋지 않았다. 어떤 때는 빵 하나로 5명이 나눠 먹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후 국제적십자사가 샐러드같은 음식을 공급, 간신히 허기를 면할 수 있었다.
다음날인 18일까지도 긴장으로 온 몸이 움츠러 들었다. 집안 식구들이 얼마나 걱정할지, 살아 나갈 수 있을지 만감이 교차했다. 기독교인인 나는 기도에 열중하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위기가 현실로 다가올 경우 담대히 받아들이겠다고 다짐했다.
19일. 억류 사흘째지만 수염이 어느새 텁수룩해졌다. 평소 친하게 지냈던 아오키 모리히사(청목성구) 일본대사가 전기면도기와 소설책을 갖다줬다. 그는 다른 동료대사들에게 20여장의 티셔츠를 나눠주고 갈아입히는 배려도 아끼지 않았다. 저녁때 캐나다 독일 그리스대사가 함께 석방되는 것을 지켜보며 『나도 석방될 수 있을까』하는 상념에 가슴이 답답해졌다.
사흘째인 20일. 절망감이 더욱 고조됐다. 혼돈속에 시간이 어찌 흘렀는지도 모른다. 하루종일 같은 기도를 계속했다. 『여기서 죽게 되면 영혼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길 바라오며 만일 다행히 구출된다면 부끄럽지 않은 기독교인으로 살아가겠다』고 기도했다.
기도가 통한 것일까. 하오 6시 조금 지나 내가 브라질 이집트 대사, 페루 야당정치인 2명과 함께 석방될 것이라는 소식을 접했다. 그리고 어떻게 대사관저를 빠져 나왔는지 정신이 없었다.
1시간반이 지나 관저밖으로 나서자마자 보도진들의 조명세례가 쏟아졌다. 간신히 회견을 마치고 경찰차량을 타는 순간 『대사님』하는 고함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김재휴 참사관이었다. 이후 만난 집사람은 눈물을 쏟았다. 사지에서 살아온 사람을 만난 감격 때문이었을까. 나의 눈시울도 젖어 있었다.<리마=조재용 특파원>리마=조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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