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주의 교육의 할아버지로 일컬어지는 장 자크 루소는 그의 명성에 걸맞지 않게 5명의 자녀를 전부 보육원 앞에 버린 것으로 유명하다. 육아지침서로 교육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의 필독서인 「에밀」을 지은 사람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행동을 한 것이다.자신이 생후 바로 어머니를 잃고 10세때 아버지에게 버림받았기 때문에 자녀들을 쉽게 유기할 수 있었는지 모른다. 루소는 참회록에서 「그들을 자신의 손으로 키울 수 없어 공공기관의 손에 맡겼다」고 변명했지만 말년엔 시설이 열악한 보육원에 자녀들을 맡겼다는 죄책감으로 심적인 고통을 겪었다.
우리 사회도 6·25를 겪으면서 많은 고아 기아가 탄생했다. 이들은 복지시설에 보내져 「고아원 아이」나 「애육원 출신」 등으로 불리면서 많은 어려움속에 성장했다. 지금은 많이 나아졌지만 사회복지시설에 대한 인상이 바람직스럽지 못했던 것도 바로 이때였고, 그 여운은 지금도 길게 꼬리를 잇고 있다.
고아원에 보내지는 것이 겁이나 아버지 시신 옆에서 10일간 생활해온 최모(12)군의 사연은 이러한 복지시설에 대한 지난날의 생각을 다시 일깨워 준다. 얼마나 우리들의 사회복지 시설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인상이 그릇됐으면 어린 초등학생이 그토록 가기 싫어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보건복지부는 소년소녀가장과 장애인을 대상으로 그룹홈보호제도를 내년부터 시범적으로 실시한다. 4∼7명을 한 그룹으로 보호자격인 보호사와 같이 단독주택이나 아파트에서 공동생활토록 해 정서적 안정을 도모한다는 것이다. 아이디어는 좋으나 다른 형태의 「고아원」탄생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걱정이다.
루소나 플라톤의 생각처럼 이러한 아이들을 국가나 사회가 돌보는 것은 당연하다. 문제는 껴안는 방법이다. 루소조차도 안절부절 못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사회복지 시설이 이들을 맡는 자체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키우느냐는 더 중요하다. 이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진리다.<논설위원실에서>논설위원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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