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론 브랜도의 광기·독설/걸작으로 못박힌 영화 “공감하지 못하면 어쩌나”오래된 필름, 그것도 일찌감치 「걸작」이란 도장을 받아놓은 작품을 이런 저런 이유로 뒤늦게 보는 일은 곤혹스럽다. 영화가 만들어진 시대의 정서를 억지로 생각해야 하고, 이미 수많은 마니아들에 의해 틀이 선 가치와 분석과 「나의 느낌」이 다르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편안한 영화보기와 느끼기」를 방해한다. 공감하지 못하면 지식인이 아닌 것처럼 여기는 분위기도 부담스럽다.
「세기의 거장」인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가 35세에 만든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가 그렇다. 많은 평론가들이 「세계영화 베스트10」으로 못박아 버렸고, 그 명예를 가슴에 달고 제작된 지 24년만에야 국내에 개봉(21일)되는 작품. 중년의 말론 브랜도가 광기와 독설을 퍼부어대는 영화.
45세의 남자 폴(말론 브랜도)은 파리에서 이름도 모르는 젊은 여자 잔느(마리아 슈나이더)와 허름한 아파트에서 미친듯이 변태적 섹스에 탐닉하다 여자의 권총에 목숨을 잃는다. 간단한 줄거리지만 베르톨루치는 그안에 온갖 상징과 비판들을 담았다.
그것들은 잔느와 섹스를 하면서 내뱉는 폴의 대사와 짐승처럼 울부짖는 행동으로 나타난다. 『너의 이름을 알고 싶지 않아. 너는 이름이 없고 나도 이름이 없어』 『또 이름? 제기랄, 내 이름이 백만개는 될꺼야』 『신 따위는 믿지 않아』 『의지가 억압에 의해 파괴되는 곳에서, 자유가 이기주의에 암살되는 곳에서 훌륭한 가문이…』 『제복 따윈 모두 쓰레기야』
폴은 어둠속에서 나왔다 들어가고, 화면을 가득 채운 큰 벽들이 그를 늘 한쪽으로 짓누른다. 반투명유리 사이에서 이뤄지는 대화. 폴은 『탱고는 의식』이라며 엉덩이를 까면서 탱고경연장을 희롱하고 잔느는 폴이 『끝은 새로운 시작이야』 『이름을 알고 싶어』라며 기존 질서 안으로 들어오려하자 거부의 총을 쏘고는 베드로처럼 세번 부정한다. 『나는 저사람을 몰라. 저 사람을 몰라. 누군지 몰라』
오래전 한 남자의 새디즘적인 성행위를 통해 엿보는 인간의 파멸, 절대 고독, 소외, 계급과 질서의 부정, 어린 시절의 상처가 남긴 정신적 황폐함이 무작정 놀랍고 충격적이지만은 않다. 역시 영화는 만들어진 시대에 곧바로 봐야한다. 메시지나 이데올로기가 강할 때는 더욱 더.<이대현 기자>이대현>
김소영(영화평론가, 영상원 교수)말론 브랜도의 나르시시즘과 베르톨루치의 강박.(★★★★)
조희문(〃, 상명대 교수)아직 유효한 현대인의 고독과 정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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