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선거를 1년여 앞두고 한국일보가 여야의원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대선 관련 설문조사결과(한국일보 12월9일자 게재)는 여야가 넘어가야할 산과 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신한국당에는 민주적인 후보경선이, 야당들에는 후보단일화가 최대과제이다. 그 과제들은 이번 선거의 성격을 규정지을 중요한 문제이므로 유권자들도 관심을 늦추지 말아야 한다. 국내 정치, 특히 대통령선거에 대한 한국인들의 관심은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만큼 뜨겁다. 정치가들을 모조리 욕하다가도 대통령 선거철이 오면 유세장마다 수만, 수십만 청중이 열기를 뿜는다. 그러나 그처럼 열을 올리면서도 자기가 어떤 후보를 지지한다든가 누구를 찍었다는 말은 좀처럼 하지 않는다. 누구에게 투표했느냐고 묻는 것 자체가 우리 사회에서는 금기이다.그렇게 된 결정적인 요인은 국민의 입을 얼어붙게 했던 오랜 독재였다. 그리고 최근에는 선거구도가 애매하여 유권자들이 자신의 선택을 분명하게 설명하기 어려웠다는 점이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했다. 특히 87년 대선에서 김영삼·김대중씨가 분열하여 군사독재 대 민주화투쟁 세력의 대결이라는 구도가 깨졌을 때, 두 사람을 한데 묶어 성원했던 사람들은 당황했다. 그들은 왜 한 김씨를 버리고 다른 김씨를 찍었는지 설명하기 힘들었다. 87년 대선에서 극도로 심화한 지역감정은 애매한 대결구도에 대한 유권자들의 좌절, 다른 선택에서 의미를 찾을 수 없었던 결과였다.
97년 대선구도 역시 김영삼·김대중·김종필씨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어렵게 되었는데 그것이 현실이라면 손을 떼라고 요구하기보다 그들이 역사 앞에서 마지막 최선을 다하도록 여론의 압력을 강화해 나가는 것이 옳다고 본다.
우선 김영삼 대통령에게는 여당의 민주적인 후보선출을 요구해야 한다. 전두환씨가 노태우씨를, 노태우씨가 김영삼씨를 실질적으로 지명했던 지나간 시대의 방식에 그가 미련을 갖는 것은 「과거청산」과 거리가 멀다. 한국일보 조사에서 대다수의 여당의원들은 후보의 자질이나 당선가능성 보다 대통령의 의중이 절대변수가 될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신한국당은 전두환·노태우씨가 이끌던 민정당·민자당과 무엇이 다른가. 신한국당은 풍부한 인재를 예비후보로 확보하고 있는데 김대통령은 다음 대통령을 자신이 결정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민주정당다운 후보선출을 추진해야 한다.
김대중·김종필씨는 정권교체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야권의 후보단일화를 거듭 주장하고 있는데 그 약속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 그들 두 사람은 지금까지 전혀 다른 노선을 걸어왔으나 정권교체를 위한 연대라면 유권자들을 설득할 수 있을 것이다. 여당은 그들의 연대움직임을 「과거로 가는 공조, 이질세력에 대한 추종」이라고 비난하고 있지만 3당 합당으로 탄생한 여당이 그같은 논리를 펴는 것은 우습다.
만일 그들이 후보단일화에 성공한다면 97년 대선의 구도는 보다 분명해질 것이다. 유권자들은 명분이 있는 선택을 할 수 있고 야당들로서는 싸워볼만한 싸움이 될 것이다. 우리 정치사에는 정변만 있고 정권교체는 없었는데 정권교체야말로 우리가 이뤄야할 한국정치사의 숙원사업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정권교체 자체가 목표일 수 없다는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다. 오늘의 상황은 『못살겠다 갈아보자』는 선거구호가 호소력을 갖는 상황이 아니다. 김영삼정권은 나름대로 개혁을 추진하여 탄탄한 국민의 지지 위에 서있으며 「타도대상」이 될 수 없다. 김대중·김종필씨가 정권교체에 성공하려면 후보단일화로 가는 협상과정에서부터 국민의 마음을 움직이고 정권교체 이상의 그 무엇을 국민에게 줄 수 있어야 한다.
후보단일화 자체가 꿈같은 얘기인데 무슨 꿈같은 주문이냐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 두 사람에게 97년 대선은 마지막 도전일 수 밖에 없으며 승패를 떠나서 정치역정을 정리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그것은 김영삼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자신이 뿌린 씨를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잘 거둬야 한다. 그들이 그렇게 하도록 촉구하는 것은 선거다운 선거를 원하는 국민의 책무일 것이다.<이사대우 편집위원·도쿄에서>이사대우>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