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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천 ‘먹자골목’/중장년 낭만의 ‘타박거리’(도시와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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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천 ‘먹자골목’/중장년 낭만의 ‘타박거리’(도시와 문화)

입력
1996.12.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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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술집·카페 등 600여개 빼곡/신세대에 밀려 갈곳없는 30∼40대/퇴근길 타박타박 들러 부담없이 즐길 수 있는 곳「타박거리」.

그곳에는 압구정동의 화려하고 도회적인 소비문화가 없다. 신촌의 패기만만한 청년문화도, 돈암동의 발랄한 10대 문화도 없다. 홍대 앞의 세련돼 보이는 언더그라운드문화도 만날 수 없다. 그런가하면 종로나 명동처럼 스스로를 증거해줄 변변한 역사마저 갖고 있지 못하다.

그곳의 이름은 신천역 일대 「먹자골목」. 신천역에서 종합운동장 사거리 사이의 올림픽로 뒷 골목이다. 송파구 잠실본동 180번지에서부터 196번지 일대가 「먹자골목」의 현주소이다.

「먹자골목」의 사람들은 이곳을 「타박거리」 또는 「뚜벅이골목」이라 부른다. 압구정동처럼 자가용족들이 몰려드는 게 아니라 퇴근길에 지하철이나 버스 등 주로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해 「타박타박」 걸어 찾아오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해서 붙여진 별칭이다.

이 곳은 거리 중간의 잠실성당을 중심으로 왼편의 메인스트리트와 오른편의 새마을 시장으로 나뉜다. 메인스트리트에는 음식점, 호프집, 카페 등이 빽빽이 들어차 있고, 새마을시장쪽으로는 좌판이나 포장마차, 분식집들이 차지하고 있다. 통상적으로 「먹자골목」은 600여 개에 이르는 가게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는 메인스트리트를 가리킨다. 새마을시장쪽은 날이 추워지면서 노점들이 많이 철시했을 뿐더러, 잇단 단속과 철거예고로 아예 문을 닫은 곳이 많아 을씨년스럽기까지 하다.

이 곳이 세간에 널리 알려지면서 새로운 지역 명소로 떠오른 것은 92, 93년께부터. 압구정동이나 홍대앞 피카소 거리 등이 퇴폐를 이유로 단속의 철퇴를 맞으면서 신흥지역 중 하나로 이 일대가 부각되었던 것이다. 여기에다 「강남 문화」를 향유하기에는 경제적 수준이나 연령대가 맞지 않는 사람들이 몰려 들면서 신천역 「먹자골목」은 전성기를 맞았다.

형성과정에서도 알 수 있듯, 이곳에는 주로 호주머니가 가벼운 서민층들이 모여든다. 골목을 가득 메우고 있는 가게들 또한 이들의 경제적 수준에 맞춰 고급 옷가게나 음식점들보다는 호프집이나 중저가대의 각종 음식점, 선술집 등 부담없이 즐길 수 있는 곳이 주를 이룬다.

이 곳에 들르는 사람들의 평균 연령대는 다른 지역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다. 이곳에서 5년째 노래방을 경영하고 있는 김경환씨는 『다른 데는 10대들이 극성이라는데, 이곳은 주로 20대에서 30대 이상이 많습니다. 젊은층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긴 하지만 다른 곳에 비하면 여전히 「늙은」 사람들이죠』라고 말한다. 그는 가격이 비교적 싸고, 교통편이 좋아 퇴근길에 쉽게 들를 수 있기 때문이 아니겠느냐고 나름의 이유를 댄다.

거리에서 만난 사람들의 대답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다른 곳에서 제 나이면 늙다리 취급을 받아요. 하지만 여기 오면 그런 따가운 시선이나 서먹서먹함 같은 걸 느낄 필요가 없어서 편안해요』 강남에 있는 직장에 다닌다는 회사원 이미경(32·여)씨의 말이다.

이 시대의 소비문화 전체가 10대들과 20대 초반 취향으로 뒤덮이다시피 한 요즘 상황에서, 중장년층의 서민적인 분위기는 이곳만이 연출하는 특징이다.

이곳에서 30∼40대 취향의 칵테일바를 운영중인 한 업주는 『돈벌이보다는 척박한 성인문화를 만들고 세워간다는 데 큰 재미와 보람을 느낀다』고 말한다. 튀지 않고 안정감있는 카페의 분위기를 즐기며 3∼4인 정도가 기분좋게 마시는 데 드는 비용은 10만원선. 먹다 남은 술은 맡겨 두었다가 언제든 찾아마실 수 있다.

주머니 사정이 넉넉치 못한 직장인들을 위해 3만 5,000원대의 생선회 한 접시를 내놓고 있는 일식집 「어향」(02-419-8956). 해물모듬탕 전문점 용궁(02-424-7666)과 고기류를 주로 내놓고 있는 송파주물럭(02-203-4201) 등은 주말 저녁 이 일대 아파트 가족 손님도 많이 찾는다.

노란 백열전 등 아래서 닭발 안주에 소주 한 잔이 주는 조촐한 멋과 향수에 젖고 싶은 사람은 새마을시장쪽의 포장마차와 좌판을 찾으면 제 격이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먹자골목」이 단지 「먹고 마시는」 퇴행적인 수준에서 답보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비판과 자성의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실제 이 곳에서는 변변한 놀이시설이나 문화공간을 찾아보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이에 대해 상인연합회 사무장으로 있는 정종현씨는 『지역 주민들과 상인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가칭 「신천 거리축제」를 내년중에 열 예정이며, 영화관, 볼링장 등 놀이·문화 시설도 적극 유치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 곳이 직면하고 있는 어려움은 이 뿐만이 아니다. 「먹자골목」의 흥취와 분위기를 더해주던 포장마차들은 내년 3월중에 일제히 철거될 처지이다. 뿐만 아니라 새로 들어서는 가게들 또한 예외없이 신세대를 겨냥한 메뉴와 인테리어로 치장하고 있어 이 곳의 독특한 분위기를 변질시키고 있다.

신천 「먹자골목」은 한편으로 신세대 소비문화의 거센 물결과, 다른 한편으로는 단란주점과 룸살롱이 정의하는 메마른 성인문화의 틈새에서 서성이고 있다. 이 시대 성인문화 공간의 현주소가 아닐까.

◎먹자골목의 칵테일하우스 ‘빅터스바’/호주머니 가벼운 직장인들 오세요/저렴한 가격… 5년째 문화휴식공간 역할

30∼40대 중장년층 문화가 없다고들 한다. 대중문화 프로그램들과 문화공간, 서비스업들은 이 세대를 외면한다. 90년대 소비 대중문화의 화려한 개막은 온통 10대, 20대에 맞춰져 있다. 고깃집 회식에 어두컴컴한 지하 단란주점만이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하는 이들 세대의 「탈출구」인 것처럼 보인다.

『처음 이곳에 바를 내겠다고 했을 때, 모두들 말립디다. 손님이 들겠냐는 거였죠. 오기같은 것도 발동하고, 또 나름대로 충분히 될 거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신천역 「먹자골목」 한복판에서 중장년층을 위한 칵테일하우스 「빅터스바」(02-415-4611)를 5년째 운영하고 있는 서한준씨.

그는 처음 한 2년동안은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러나 지금은 애초 생각한 수준에 거의 근접할 만큼 손님이 든다. 한창 어려울 때에도 「30대 이상을 위한 공간」을 만들겠다는 고집을 바꾸지 않고 버틴 결과이다.

실제 「빅터스바」의 실내 분위기나 운영방식 등은 여느 카페와는 무척 다르다.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마시고 남은 술을 비치해둘 수 있게 한 개인 전용 「키박스」. 박스마다 따로 열쇠가 있어서 언제든 와서 남은 술을 마실 수 있다. 키박스는 모두 150개 정도인데, 공간이 모자라서 카운터에 맡겨둔 술병만도 20개 이상이다. 그만큼 단골고객이 많다는 얘기다.

60여 평 공간에 테이블이 17개, 바스툴(등받이가 없는 둥그런 의자)이 23개로 넉넉하다. 주차는 20대까지 가능하고, 상오 11시부터 자정까지 연다.

실내는 조명을 낮게 조절해 조용히 얘기를 나눌 수 있게끔 배려했다. 종업원들 또한 25∼26세 이상에 일괄적으로 유니폼을 착용토록 해 낮은 가격대에 호텔 수준의 서비스를 즐길 수 있게 했다.

밤 9시부터 11시까지는 피아노 라이브 연주가 매일 열린다. 술값은 양주 큰 것 한 병에 안주 합쳐서 10만원대로, 호주머니가 가벼운 직장인들을 고려했다.

『제가 나이 마흔줄인데, 저부터가 마땅히 갈 곳이 없어요. 이곳에 중장년층을 위한 공간이 넘쳐나서 저희 가게 손님들이 모두 옮겨갈 때까지는 사명감을 가지고 해야지요』라는 서씨의 말에서 다시 한번 중장년층 문화휴식공간의 부재를 확인한다.<황동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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