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맺힌 부정이 철의 동토 뚫었다/재미 최영도씨 딸 위해 치밀계획/몸 아프자 며느리 보내 탈출 돕게/새벽 4시에 두만강 건너 조선족 안내인 만나/베이징선 한국대사관에 협조 요청하기도/기차·버스로 남하… 밀수선 대절해 홍콩에김경호씨 일가의 탈북은 회령을 출발해 홍콩에 도착하기까지 29일이 걸린 엑서더스였다. 새벽에 두만강을 건너 룽징(용정)과 선양(심양)을 거쳐 베이징(북경)으로 와 남으로 남으로 내려왔다. 기차로 광저우(광주)로 왔고 광저우에서는 버스로 선전(심)으로 가서 밀수선을 타고 홍콩에 밀입국했다. 김씨 일가의 엑서더스는 미국에서 온 올케가 현장지휘를 했고 장인 최영도씨(79)는 몸이 아파 뉴욕에서 원격조정 했다. 김씨 일가는 옌지(연길)에서 부터 올케가 채용한 조선족 안내원의 안내를 받았다.
▷북한탈출◁
10월25일 함경북도 회령의 밤은 스산한 겨울바람 소리와 함께 차갑게 깊어갔다. 하지만 김씨부부와 아들 딸 가족 등 17명의 가슴은 밤이 깊어갈수록 팽팽한 긴장으로 부풀어 올랐다. 이들의 탈출계획을 도와줬던 사회안전부 안전원 최영호는 며칠전 마침내 『10월26일 새벽 두만강을 건넌다』고 말했다.
김씨 부부는 회령에 사는 5명의 자녀와 가족들에게 26일 새벽에 출발한다고 알렸다. 장녀가족은 회령이 아닌 원산에 살아 함께 올 수 없었다. 장녀가족은 원산에서 집도 없이 유랑생활을 하고 있어 연락조차 취할 수 없었다. 가져갈 것은 별로 없었다. 몇가지 방한복과 숫가락, 사진 몇장 등이 짐의 전부였다.
26일 새벽 2시 집을 나선 일가가 회령 인근 두만강가에 도착한 시간은 새벽 4시. 불과 수십여m에 불과한 강을 건너면 룽징까지는 도보로 2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다. 최안전원은 최근 「강변무역」이 빈번해 국경경비대의 감시가 느슨해진 점에 착안, 경비취약시간인 새벽 4시를 택했다. 그러나 경비병을 따돌리는데는 뇌물제공 등 치밀한 준비가 뒤따랐다.
마음졸였던 두만강 도강은 수심이 어른 허리까지 밖에 차지 않아 의외로 쉬었다. 십여분만에 룽징쪽 강기슭에 도착했을 때 기다리고 있던 조선족 교포들이 그들을 맞았다. 그들은 『오늘 밤안으로 내처 달려 옌지까지는 가야한다』고 말했다.
▷사전계획◁
김씨 일가의 엑서더스는 미국 뉴욕의 플러싱에 살고있는 장인 최영도씨의 치밀한 계획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최씨는 1·4후퇴 당시 형제들과 함께 월남했으나 딸인 현실씨는 북에 남았다. 최씨는 60년대 미국에 이민했으나 두고온 딸을 평생 한으로 간직했다. 최씨는 미국시민의 북한여행이 자유로워지자 90년대 초반이후 10여차례 북한을 드나들면서 딸의 가족을 만났다. 최씨는 수시로 딸에게 달러를 송금해주기도 했지만 먹을 것조차 궁한 딸 일가의 참상을 보다못해 이들을 남한에 데려오기로 결심했다.
최씨는 이를 위해 룽징 옌지 등지의 조선족 교포들을 사귀면서 탈출가족의 중국 여행 루트를 마련했다. 김씨는 장인이 송금해준 달러로 안전원 최씨를 이미 매수해 놓았다.
최씨는 몸이 아파 직접 거동이 힘들어지자 며느리를 중국에 보내 김씨일가의 탈출을 현장에서 돕도록 했다. 최씨는 뉴욕에 주재하고 있는 우리정부관계자를 통해 딸가족의 탈북을 추진하고 있음을 알리면서 협조를 요청하기도 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옌지에서 홍콩까지◁
김씨 일가는 올케가 특별히 고용한 조선족의 안내를 받아 베이징을 거쳐 11월22일 홍콩에 인접한 선전(심)까지 왔다. 최씨는 베이징에서 우리정부 관계자에게 망명의사를 밝히며 베이징 주재한국대사관의 협조를 요청했으나 한국대사관은 탈북자를 인정하지 않는 중국정부의 입장때문에 이들을 도울 수 없었다.
베이징에서 광조우 까지는 기차를, 광조우에서 선전까지는 전세버스를 이용했다. 선전에서 돈을 주고 밀수선을 대절해 홍콩에 밀입국했다. 홍콩에 도착하자 마자 경찰에게 일부러 발각돼 한국으로 가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홍콩경찰은 이들을 신졔(신계)에 있는 상쉬(상수)수용소에 수용하면서 홍콩정청을 통해 홍콩의 한국총영사관에 이를 알려왔다. 홍콩의 우리 정부관계자들은 5일 김씨 일가를 면담했고 관련서류 일체를 전달받았다.<장인철 기자>장인철>
◎김씨 가족 2남4녀 손자 5명… 큰딸 못와/맏형·누나·여동생 등 이태원에 거주 알려져
김경호씨(62)는 남한 출신으로 6·25때 의용군으로 북에 끌려갔다. 57년부터 함북 회령시에서 집단농장의 「농장원」으로 일했으나 최근 중풍으로 노동력을 상실, 공장노동자로 소속이 바뀌었다. 김씨는 맏형 김경태씨(71세 가량)와 누나 김정순씨(65세) 등과 여동생 여러명이 서울 이태원동에서 살고 있다고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부인 최현실씨(57)와는 전쟁 후 결혼, 처음에는 평양에 살았다. 탈북을 결정적으로 도와준 재미교포 최영도씨(79·뉴욕 플러싱 거주)는 장인이다. 현실씨의 동생 철호씨도 뉴욕에 살고 있으며 현실씨의 삼촌인 최전도씨(76)는 지난해까지 서울 중랑구 면목동의 베델의원 원장이었다.
김씨 부부는 2남4녀를 두었고 장녀가족만 빼고 전가족이 함께 탈북했다. 장녀 가족은 회령에 살지않아 같이 오지 못했다.
장남 금철씨(30)는 인민군 분대장 출신으로 자녀 1명을 두고 있다. 이밖에 차녀 명실씨 부부와 자녀 두명, 3녀 명숙씨 부부와 자녀 2명, 4녀 명순씨 부부, 그리고 미혼인 차남 성철씨(26) 등이 함께 탈북했다.<박진용 기자>박진용>
◎탈북 단골루트 왜 홍콩일까/영국관할로 망명 쉬워
김경호씨 일가족이 귀순 경로로 홍콩을 선택, 홍콩이 단골 「탈북경로」임이 재확인됐다. 그러나 홍콩이 97년 7월1일 중국에 귀속될 예정이어서 앞으로 탈북자들의 귀순 과정도 다소 변화가 예상된다.
홍콩을 탈출 경로로 이용한 북한주민은 93년 2명, 94년 8명, 95년 4명, 올해 10명 등 90년대 이후 30명을 넘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사정은 홍콩이 우리의 단독 수교국인 영국의 관할아래 놓여 있기 때문에 비교적 자유롭게 망명신청이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정부 당국자는 『홍콩당국은 그동안 북한주민들의 망명신청이 있을 경우 유엔고등판무관(UNHCR)의 개입을 요청하지 않고 자체적으로 신원과 망명동기 등을 조사한 후 당사자의 자유의사가 최종 확인되면 대부분 수용했다』고 설명했다.
반면에 중국은 북한을 의식, 탈북자들의 망명허가에 소극적이고 이에 따라 베이징주재 우리 대사관도 중국의 입장이 곤란해지지 않도록 탈북자 문제에 대해서는 신중하게 대처해 왔다. 따라서 홍콩이 영국 관할에서 중국에 이양되는 내년 7월1일부터는 홍콩행 탈북자 행렬이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김병찬 기자>김병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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