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스트(흑사병)가 역사상 가장 큰 피해를 준 질병은 아니다. 말라리아처럼 더 오랜 기간 훨씬 더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과 죽음을 안겨준 질병도 있다. 두창과 같이 아예 한 문명(고대 아메리카문명)을 거의 폐허화한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인류, 특히 서양인들의 뇌리에 페스트만큼 깊이 각인돼 있는 질병은 없을 것이다. 서양인들이 결핵과 에이즈 등에 「백색 흑사병」, 「현대의 흑사병」 등 듣기만 해도 무시무시한 별명을 붙이는 이유도 이 때문일 것이다.
페스트에 관한 기록은 고대의 인도 그리스 로마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중 유명한 게 기원전 5세기말 펠로폰네소스전쟁 당시 아테네에 만연했다는 역병이다. 그러나 당시 질병들이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페스트와 같은지는 확실치 않다. 그리스-로마어에서 파생한 영어에 페스트를 뜻하는 「plague」가 역병(큰 전염병)이라는 뜻도 갖고 있듯이 고대의 기록에 나오는 페스트가 다른 큰 전염병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역사상 그 정체가 분명한 최초의 페스트는 14세기 중엽 유럽을 휩쓴 것으로, 특히 흑사병으로 불리웠다. 600년전 일인데도 아직까지 유럽인들에게 공포의 대상으로 떠오르는 것을 보면 당시 피해가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황상익 서울대 의대 교수·의사학>황상익 서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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