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탑과 성·돌길·돌다리/고색창연한 옛거리를 거닐며 드보르작과 스메타나 카프카의 숨결을 느낀다스메타나와 드보르작의 웅장한 교향시와 교향곡이 귀에 쟁쟁한 도시. 카프카의 숨결이 살아 숨쉬고 모차르트가 사랑했던 도시.
프라하. 체코의 수도 프라하는 한나절에 돌 수 있는 작은 도시이다. 하지만 한나절에 발길을 돌리기에는 그 아름다움이 너무나 아까운 도시이다.
이 곳에는 음악과 문학, 역사가 살아 있다. 동부유럽의 로마라고 사람들이 부를만큼 도시 전체는 박물관이다. 아름다운 탑과 성, 돌길과 돌다리, 사회주의의 유산을 전혀 느낄 수 없는 자유롭고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들.
그리고 슬픈 역사. 다니엘 데이 루이스와 줄리엣 비노쉬의 영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프라하의 봄)을 본 사람들은 프라하의 모습을 떠올릴 것이다.
프라하는 고색창연한 구시가지와 새로 건설된 신시가지로 구성돼 있다.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은 물론 구시가지. 구시가지는 중세의 모습이 그대로 살아있어 짙은 페이소스를 자아낸다. 돌길을 따라 걸어서 돌아볼 수 있어 더욱 그만이다.
프라하는 고대 건축양식의 박물관이다. 고딕에서 르네상스 바로크 로코코 등의 각종 건축양식이 그대로 보존돼 있다. 구시가지의 골목길을 걷다보면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중세로 돌아와 있는 느낌이다. 목조로 된 오밀조밀한 건물과 검은 대리석이 깔린 골목길에서 금새라도 중세복장을 한 체코사람이 나타나 말을 걸어 올 것만 같다.
구시가지 한복판에 있는 시청건물의 옥상에 올라가면 각종 형태의 첨탑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래서 프라하는 백개의 탑이 있다는 「백탑의 도시」라는 별명을 지니고 있다.
시청광장에는 마르틴 루터보다 100년이나 앞서 종교개혁의 봉화를 올렸던 얀 후스의 동상이 서있다. 동상의 밑받침에는 「진실을 사랑하고 진실을 이야기하고 진실을 지켜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얀 후스의 종교개혁 이념은 체코의 민족주의로 면면히 이어져 이나라 사람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고 있다. 체코사람들은 후스가 순교한 7월6일을 국경일로 정해 그의 정신을 기린다.
프라하는 보헤미아 왕국의 수도로 출발했으나 14세기 찰스4세(찰스대제)가 신성로마제국의 수도를 이곳에 정하면서 전성기를 맞았다. 구시가지의 대부분이 이때 건설된 것이다. 프라하는 이후 합스부르그 왕가와 오스트리아 헝가리제국의 지배를 받으며 명맥을 유지한다.
유럽의 많은 고도가 수많은 전쟁을 거치면서 파괴됐지만 프라하는 체코가 강대국에 저항하지 않고 시류를 잘 타는 바람에 원형보존이 가능했다. 특히 프라하는 1·2차 세계대전 때 전화를 면할 수 있었다.
모차르트의 일생을 그린 영화 「아마데우스」도 이런 연유 때문에 프라하에서 촬영됐다. 모차르트가 활동했던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은 2차세계대전 때 공습으로 많은 부분이 파괴돼 버렸기 때문이다. 실제로 모차르트는 프라하를 자주 방문했고 이곳에서 오페라 「돈죠반니」를 작곡, 초연했다. 그가 머물렀던 베르트램카 건물은 모차르트 기념관이 되었다.
구시가지에서 고개를 들어 바라다보면 언덕배기에 동화에서나 봄직한 고성이 보인다. 프라하 성이다. 구시가지와 프라하성 사이는 스메타나의 교향시 「나의 조국」으로 유명한 블타바강이 흐른다.
이 강 위로 놓인 다리 중 가장 유명하고 아름다운 것은 칼레르 다리이다. 이다리를 건설한 찰스대제의 이름을 체코어로 한 것이다.
1406년에 건설돼 중동부유럽에서는 가장 오래된 다리로 길이 520m, 폭 10m이다. 차량통행은 금지돼 있다. 다리 양끝에 고딕양식의 탑이 있고 양쪽에는 한 쪽에 15명씩 모두 30명의 역사적인 성자의 조각이 강을 굽어보고 있다. 조각 하나하나가 당대 최고의 조각가들이 만든 것으로 모두가 예술품이다. 이 다리는 밤이 되면 조명을 받아 더욱 아름답게 빛난다. 유랑악사들과 거리의 화가들이 관광객을 부른다. 다리입구에는 스메타나 기념관이 있다.
다리를 건너 언덕을 올라가면 프라하 성이다. 성의 초입에는 대통령 집무실이 있다. 시인출신으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하벨 대통령이다. 하벨 대통령이 프라하에 있으면 건물 위에 체코국기가 게양된다. 관광객들은 집무실 바로 코앞까지 갈 수 있다.
프라하성에서 우선 눈에 띄는 것은 탑높이가 124m인 성 비투스성당이다. 찰스대제때 부터 세워 500여년 만에 완성된 이성당에는 지하에 찰스대제 등 역대 왕들의 무덤이 있다. 구왕궁을 지나면 한 켠에는 옛날 왕궁의 황금세공사들과 일꾼들이 살았다는 조그만 집이 늘어서 있다. 「황금의 소로」라 불리는 오두막집은 어른이 허리를 굽혀야 들어갈 수 있는 조그만 집들이다. 이 곳에는 프란츠 카프카가 그의 대표작 「성」을 집필한 목조 2층집도 있다.
성의 전망대에 오르면 블타바강이 S자형으로 굽이쳐 흐르는 프라하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아득하게 형형색색의 탑이 점점히 박혀 있는 프라하의 모습을 보면서 역사의 한 가운데 내가 서 있음을 느낀다.
◎너무 아름다워 사연도 많은/500년된 ‘천문시계’
프라하 구시가지광장의 가운데 있는 구시청사는 전형적인 고딕건축물이다. 현재의 모습은 2차대전 때 독일의 폭격으로 상당부분이 불탄 뒤 복구한 것이다. 구시청사에 들른 관광객이라면 누구나 빠짐없이 사진을 찍는 곳이 두 군데 있는데 얀 후스의 동상과 함께 최고의 관광명소인 천문시계이다.
얀 후스의 동상은 언제나 사진을 찍을 수 있지만 천문시계는 1시간에 한 번 밖에 기회가 없다. 매 정시가 다가올 때 관광객들은 이곳에 몰린다.
매시 정각이 되면 두 개의 원반 위에 있는 천사의 조각상 양 옆의 창문이 열리고 종이 울린다. 종소리와 함께 예수의 열두제자가 창의 안쪽으로 천천히 나타났다 사라지고, 마지막에는 시계의 가장 위쪽에서 닭이 나타나 운다.
천문시계의 유래에 대해서는 두가지 설이 있다. 1490년에 시계 제작의 거장이었던 미쿨라슈가 제작자라는 이야기가 있고, 비슷한 때에 천문학자이며 칼레르대학의 수학교수였던 하누슈가 만들었다고도 한다.
하누슈에 대해서는 이런 뒷 이야기까지 전해오고 있다. 하누슈가 천문시계를 만든 뒤 똑같은 시계를 만들어 달라는 요구가 여기저기서 끊이지 않았다. 어느날 밤, 하누슈는 괴한의 습격을 받아 눈을 다쳤고 이 때문에 결국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의 죽음과 함께 시계가 멈추었는데 몇번의 수리 끝에 가까스로 시계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금은 1948년에 설치된 전동 장치에 의해 작동되고 있다.
◎바츨라프 광장/‘프라하의 봄’ 바로 그 무대/구국영웅 바츨라프동상 아래엔 탱크에 맞섰던 두 젊은이 사진이
프라하 국립박물관 앞 대로에는 광장이 있다. 바츨라프 광장이다. 길이 750여m에 폭이 60여m로 광장이라기보다는 큰 거리이다.
바츨라프는 체코의 신화적 영웅이다. 체코전설에 의하면 바츨라프는 10세기경 체코에 국난이 닥쳤을 때 동굴에서 잠자고 있던 보헤미안 기사들을 일으켜 깨워 적군을 물리치고 나라를 구했다. 그는 바로 체코의 조국혼이다.
광장 맨 앞쪽에는 투구 차림에 말을 타고 호령하고 있는 바츨라프의 기마상이 버티고 서있다. 그리고 양쪽에는 우리의 명동에 해당하는 프라하의 중심가가 널따랗게 펼쳐진다.
우리가 알고 있는 「프라하의 봄」현장이다. 체코국민과 프라하시민들은 구소련의 압제에 시달리면서 이곳에서 자유를 외쳤다. 그리고 89년에 결국은 이곳에서 민주화를 쟁취했다.
바츨라프 기마상 조금 아래에는 68년 「프라하의 봄」때 구소련 탱크에 맞서 분신한 두 명 젊은이들의 사진이 놓여있다. 사진 앞에는 이들을 기리기 위해 심어놓은 나무가 있다. 당시 찰스대에 다녔던 얀 파리크군 등 두 학생은 21세의 꽃다운 젊음을 조국의 민주화에 바쳤다. 프라하 사람들은 지금도 이들의 사진 앞에 꽃을 바치며 스러진 젊은 영혼을 추모한다.
우리는 「프라하의 봄」이 곧바로 프라하의 민주화운동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조금 다르다. 「프라하의 봄」은 체코 필하모니 결성 50주년을 기념해 46년부터 매년 5월에 프라하에서 열려온 음악제 이름이었다. 전통적으로 개막일에는 스메타나의 「나의 조국」이, 페막일에는 베토벤의 교향곡 9번이 연주된다.
68년 체코사태가 났을때 한 외신기자가 현장르뽀를 하며 『「프라하의 봄」은 과연 언제 올것인가』라고 타전했다. 이후 「봄」이라는 단어가 주는 자유의 이미지와 겹쳐 「프라하의 봄」은 체코자유민주화 운동을 상징하는 용어가 되었다.
이 기사는 세계각국에서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면 지명에 「봄」을 붙여 부르는 하나의 관례를 만들었다. 폴란드에는 「바르샤바의 봄」이, 헝가리에는 「부다페스트의 봄」이 각각 있었다. 우리도 10·26 이후 80년 4∼5월에 일어났던 민주화운동을 흔히 「서울의 봄」이라고 부르고 있다.<프라하=이병규 기자>프라하=이병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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