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이런 법도 있냐(정달영 칼럼)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이런 법도 있냐(정달영 칼럼)

입력
1996.12.04 00:00
0 0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 있냐』고 한다. 어이없는 일을 당했을 때 사람들이 흔히 던지는 탄식이다.무면허 음주운전 뺑소니 혐의를 받은 탤런트 신은경이 구속적부심에서 풀려나자 「국민의 법감정」이라고 하는 시민적 분노가 격렬하게 표출되었다. 담당판사의 가정에까지 협박전화가 쏟아지는 폭력적 사태였다.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 있냐』는 힐난도 물론 포함됐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법」이 없기로는 전화폭력이기 쉽지, 피의자의 불구속 수사와 불구속 재판은 「이런 법」이 엄연히 있다. 있을뿐만 아니라 헌법정신이 그러하다. 문제가 있다면 이제까지 구속수사―구속재판을 능사로 해온 관행이고, 그러한 관행과의 불공평 논란이다.

불공평 논란은 남아 있다. 그러나 설득력 있는 여러 비판과 부정적 견해에도 불구하고 「신은경 석방」은 피의자의 인권보호를 강화하는 뜻에서 잘한 결정이다. 그렇지 않아도 시행을 한달 앞둔 새로운 인신구속제도는 이제까지의 관행에 익숙해 온 우리의 「법감정」을 수정하도록 요구하는 중이다. 법앞에 만인이 100% 평등하다는 기본인권의 이상은 좀처럼 성취하기 어려운 환상일는지 모르지만, 역사가 그런 방향으로 전진해야 하는 것은 최소한의 희망이고 필연이다.

사법부의 「잘한 결정」 가운데는 「시사저널」 이교관기자에 대한 구속영장 기각이 단연 신선하다. 고소인이 청와대였다는 점, 검찰이 수사와 구속을 서둘렀다는 점, 국민의 알 권리와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이 날카롭게 충돌하는 사안이었다는 점 등으로 관심을 모았던 이 사건에 대해 법원은 결국 언론출판자유를 폭넓게 인정하고 불구속수사―불구속재판의 원칙을 다시 확인하는 선에서 판단을 내린 것이다. 명예훼손 여부에 대한 법의 심판은 재판을 통해 내려지겠지만, 중요한 것은 피고소인의 석방이 말해 주는 「유죄확정까지는 무죄추정」의 원칙이다. 넥타이 매고 당당히 재판받는 형사피고인의 모습을 앞으로 자주 목격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한국적 인권상황의 진전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법원은 최근 세간의 관심을 모은 몇 살인사건의 재판을 통해서도 엄격한 증거주의를 적용한 인권존중 판례를 남기고 있다. 치과의사모녀피살사건 피고인에 대한 항소심 무죄, 가수 김성재피살사건 피고인에 대한 항소심 무죄판결 등이 그것이다. 이런 사례들을 앞의 불구속수사 결정들과 뭉뚱그려서 평가할 일이 아닌지는 모르지만, 법원이 시행하기로 한 영장실질심사제도와 함께 매우 중요한 변화이고, 우리 사회의 인권상황 선진화를 위한 좋은 조짐의 하나임에 틀림없다.

인권은 인간 존엄성을 지키는 불가침의 가치다. 인권을 말한다는 것은 과거에는 독재권력에 맞서 민주화투쟁을 하는 것과 같은 뜻이었다. 그만큼 정치적인 함축이 강하다. 지금도 정치적·경제적 위력의 그늘에서 신음하는 인권사각이 널려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제부터 덧붙여 말해야 하는 인권은 삶의 모든 영역에 걸친 보편적이고 최소한의 기준에 관한 것이다. 법앞에서의 평등, 구속되지 않고 재판받을 권리는 그 시작의 시작일 뿐이다.

우리는 먼저 우리 사회가 아직도 얼마나 폭력적이며 반인권적인 상황에 놓였는가를 우리의 생활주변에서 발견하고 성찰하는데서 출발해야 한다. 반차별과 소수―약자보호는 인권의 기본정신인데, 지금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는 조선족동포의 문제나 외국인 노동자, 장애인, 노인 등 모든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무관심·무시·차별·학대는 우리 자신이 인권의 가해자 편에 서 있을 수 있음을 큰 소리로 말해주고 있다.

3일은 마침 유엔이 정한 장애인의 날이어서 국내에서도 여러 행사들이 벌어졌다. 오는 10일은 세계인권선언기념일이다. 기념일에 일과성 행사를 하거나 대통령이 외국에서 제정한 장애인상을 받아 국민적인 격려가 된 것도 나쁜 일은 아니지만, 중요한 것은 내용이고 실질이다. 우리의 삶의 중심에 인권이 바로 놓이고, 모든 사회적 약자들에게 가해지는 제도적·관행적 폭력이 줄어들고, 인간존엄성에 대한 믿음과 희망이 우리 사회안에 자리잡게 되도록 하자면 우리가 지금 무엇부터 시작해야 하는지, 골똘히 따져 봐야 한다.<상무이사 겸 심의실장>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