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주연급은 10명미만/겹치기 출연에 식상해도 흥행노려 이미지 재탕삼탕/배우만들기 노력은 뒷전인채 뜨는 탤런트 모셔오기까지배우가 없다. 그 얼굴이 그 얼굴이다. 수많은 배우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은 한 목소리로 『쓸만한 스타가 없어 영화 만들기가 힘들다』고 말한다.
한국영화배우협회에 등록된 배우의 숫자는 1,000여명. 그러나 영화 한 편을 만들려는 기획자와 감독의 머릿속에 주연배우로 떠오르는 이름은 열명도 안된다. 남자배우는 「빅3」 박중훈 한석규 최민수와 안성기 문성근. 여자배우로는 심혜진 최진실 정선경. 여기에 올들어 주연급으로 가세한 이정재 신현준 진희경 정도다.
이들은 지난해 흥행작과 올해 주요 작품의 대부분에 겹치기 출연했다. 90년대 들어 스타시스템의 무게중심이 남자배우 중심으로 바뀌면서 남자스타의 의존도는 더욱 커졌다. 때문에 관객들은 어느 영화에서나 이들의 모습을 볼 수 밖에 없다.
박중훈은 지난해 「마누라 죽이기」 「총잡이」 「꼬리치는 남자」에 이어 올해 「투캅스2」 「돈을 갖고 튀어라」에 출연했고 앞으로도 「깡패수업」 「똑바로 살아라」에 나올 예정이다. 최민수 역시 「테러리스트」 「아찌아빠」 「사랑하기 좋은 날」 「피아노맨」 등 최근작에 이어 「쿠데타」 「인샬라」에 출연하게 된다. 아무리 연기변신이 능하다 해도 이 정도의 겹치기 출연이면 보는 사람이 식상할 수 밖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스타를 잡기 위한 경쟁은 여전히 치열하다. 이미 여러 작품에 출연이 내정된 배우의 스케줄에 맞춰 제작 일정이 몇개월씩 늦춰지는 일이 허다하다. 「닥터봉」과 「은행나무 침대」로 현재 충무로의 최대 표적이 된 한석규는 작품선택이 워낙 까다로워 1년에 두 작품 이상을 하지 않으려고 해 영화사들의 애를 태우고 있다.
영화기획자들은 그래도 『빅스타가 없는 영화는 상상할 수 없다』고 말한다. 92년 이후 대기업들의 영화제작이 늘어나면서 이 경향은 더욱 심해졌다. 대기업 투자자들의 10억이상 제작비를 움직이는 가장 큰 요소는 안정적인 관객 동원과 지방 흥행, 비디오 판매를 보장받는 스타의 기용이다. 한 두번 연출한 뒤 사라지고 마는 신인감독들이 대부분 대기업의 제작비로 영화를 만들게 되면서 감독의 영화에서 배우의 영화로 바뀌는 추세는 가속화하고 있다.
그러나 쓸만한 주연을 애타게 찾는 영화계가 배우 만들기에 기울이는 노력은 미미하다. 대부분은 TV에서 「뜨는」스타들을 기다렸다가 모셔오는 손쉬운 방법을 택한다. 거액을 들여 캐스팅한 스타 탤런트. 그들은 TV에서의 캐릭터를 그대로 영화로 옮겨놓은 데 불과한 연기로 관객들을 실망시키는 경우가 많다.
신인공모는 한순간에 주연급 스타가 되는 중요한 코스 중의 하나다. 정선경 오정해 이정현 이혜은 등이 대표적인 경우. 그러나 첫 작품에서의 강한 이미지를 벗고 여러 작품에서 주연급으로 성장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영화사 역시 시간과 노력을 들여 신인을 뽑지만 배우의 한 작품 이후를 생각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감독들의 연출력 부족도 쓸만한 주연급 배우들을 많이 만들어내지 못하는 이유다. 신인이나 조연급들을 주연급으로 끌어올리는 데는 배우의 연기를 완벽히 통제하는 감독의 역량이 가장 중요하다. 그러나 현재 대부분의 감독들은 스타의 새로운 이미지를 창출해내지 못하고 기존 이미지들만을 재탕 삼탕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훌륭한 자질을 가진 조연급 배우들이 경계선을 뛰어 넘지 못하는 데는 감독들이 배우를 재탄생시키지 못하는 이유가 크다. 신현준 김승우 방은진 같이 몇년간의 조연생활 끝에 주연급으로 격상한 경우는 바람직하지만 아주 드문 케이스다.
정규적인 배우양성 기관에서의 배우교육은 스타를 기초부터 만들어내는 가장 바람직한 대안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난해 씨네2000에서 설립한 6개월 교육과정 씨네 아카데미는 3년동안 전속배우로 출연하는 조건으로 무료로 배우들을 키우고 있다. 그러나 한 영화사가 1년에 제작하는 영화가 고작 한 두 편인 영세적인 운영구조에서 영화사 전속배우의 의미는 매우 약하다. 영화인들은 여러 영화사들이 공동으로 배우들을 양성하고, 공동 전속 배우로 여러 영화에 출연시켜 다양한 연기경험을 쌓게 해주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영화는 언제나 스타를 기다린다. 관객들은 스크린에서 스타와 함께 꿈을 꾸고, 제작자들 역시 영화 탄생의 초기부터 변함이 없는 스타시스템의 위력을 믿고 있다. 지금 『배우가 없다』고 울상짓는 영화계의 모든 사람들은 진정한 스타 만들기에 힘을 모아야 할 때다. 스타는 하루 아침에 탄생하지 않는다.<이윤정 기자>이윤정>
◎스타없이도 ‘뜨는’ 작품 있다/‘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등 연기력·감독 역량 탄탄
어렵다. 스타급이 아닌 배우들이 출연한 영화가 흥행에서 성공을 거두기란 정말 어렵다. 영화는 어차피 「대중 예술」이고 그들이 추인한 배우가 아니면 좀처럼 눈길을 주지 않는 게 대중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능하다. 저예산의 악조건을 감독의 작가적 역량으로 채울 수 있다면, 그래서 배우들을 자유롭게 「부릴 수만 있다면」 굳이 스타에 의존하지 않아도 「작품」이 된다.
지난 4월 영화계에는 박중훈 김보성 주연의 「투캅스2」, 광주항쟁을 다룬 영화 「꽃잎」외엔 마치 영화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정작 이 때 영화비평가들이 한결같이 칭찬한 영화는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이류소설가와 그의 유부녀 애인, 아내를 의심하는 남편, 소설가를 흠모하는 극장 매표소 직원 등 그저 그런 인생들의 이야기는 차분한 유럽 스타일로 서술됐다.
김의성, 박진성, 이응경, 조은숙 등 신선한 마스크의 연기는 차분한 영상 언어와 조화를 이뤘다는 평을 받았다. 김의성, 박진성은 유명세는 없었어도 이미 탄탄한 연기력을 인정받은 터였고, 이응경과 조은숙은 감독의 손끝에서 독특한 캐릭터로 재탄생했다.
단편영화 시절부터 주목을 받아온 임순례 감독의 「세친구」역시 삼겹, 섬세, 무소속이라는 재미있는 이름을 가진 무명 주인공들이 출연했다. 삼성영상사업단이 돈을 댔지만 「작가 영화」의 냄새를 풍기기 위해 초신인 배우들을 기용했고, 결과는 좋았다.
5억원의 저예산으로 만들어진 한국최초의 독립영화 「내일로 흐르는 강」(감독 박재호) 역시 가부장제와 동성애를 소재로 다룬 참신한 작품. 주인공 정민 역에 낯선 배우 이대연이 기용됨으로써 형식과 내용의 「실험성」이 한결 강조됐다.
5일장을 다큐멘타리 형식으로 엮은 박철수 감독의 「학생부군신위」는 이렇다할 주연이 없는 영화지만 송옥숙, 방은진 등 중견연기자의 연기가 다소 지루한 영화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이민용 감독의 「개같은 날의 오후」역시 송옥숙 손숙 하유미 등 조연급 연기자들의 활약이 없었더라면 큰 성공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물론 이같은 예들은 「얼굴보다는 연기력」을 중시, 무명배우를 기용했다 낭패를 본 수많은 영화들의 실패를 전제로 한 것이다. 하지만 적은 제작비로 「감독의 예술」인 영화를 구현해낼 수 있는 틀이 마련된다면 「무명배우와 흥행」은 굳이 상극만도 아니다. 영화 마니아들이 미국의 저예산 영화인 「B급영화」속에서 「쓰레기통에서 보석을 찾아내는」 즐거움을 맛보는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박은주 기자>박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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