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작가 베르코르의 중편소설 「바다의 침묵」은 침묵이 얼마나 효과적인 저항 수단인가를 보여준다. 나치 치하에서 프랑스 문화를 선망하는 독일장교의 집요한 접근에 침묵으로 맞서는 노신사와 그의 여조카 이야기이다. 세 사람 사이에 흐르는 6개월 동안의 긴장과 이윽고 찾아오는 사필귀정의 결말이 밀도 높게 묘사된다. 등사기에 의해 비밀리에 복제된 이 소설은 치욕 속에서도 프랑스 정신이 살아 있음을 세계에 알렸다.그러나 그 나라의 산문가 장 그르니에는 이 소설 속 여주인공의 침묵조차 『충분치 않다』고 폄하한다. 그는 『항상 책망하는 침묵과, 찬성하는 침묵이 존재했다. 우리는 언제나 공개적으로 항의해야 한다』고 말한다. 『침묵은 망각을 장려한다』고도 질타한다.
우리는 최근 두 개의 침묵을 보았다. 백범 살해범 안두희씨와 5·18과 관련된 최규하 전대통령의 침묵이다. 안씨는 침묵을 지키다가 끝내 죽음을 맞고 말았다. 중요한 비밀을 쥐고 있는 그들의 증언거부로 인해 역사적 광정이 불가능해지고 있다.
주변의 간곡한 설득과 신경질적인 협박까지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도, 그들이 고집스레 함구한 것은 대체 무슨 이유일까. 그들의 함구는 먼저 「바다의 침묵」의 여주인공처럼 확고한 신념이나 자존심 같은 내면적 진실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이럴 때 신념을 지닌 자는 당당한 모습을 보이게 마련이고, 누구도 그의 내면적 진실까지 비난할 자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두 사람은 그 여주인공과는 달랐다. 안두희씨는 진상을 밝힐 듯한 제스처로 그때그때의 위기를 넘겼고, 최 전대통령은 『바람직하지 않은 전례를 남길 수 없다』면서 증언을 피하고 있다. 신념 때문이 아니라면 누가 그들에게 「침묵의 계율」을 부여했을까. 또한 계율을 지킴으로써 얻는 반대급부는 무엇이었으며, 이를 어겼을 때 받을 불이익은 어떤 것일까, 배후가 있다면 그것은 개인일까 집단일까 하는 물음이 잇달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의문은 의문으로 끝날 뿐이다.
단 한 가지, 그 침묵에서 분명하게 느껴지는 것은 우리 사회 저변에 깔린 투명하지 않은, 음습한 분위기이다. 문민정부 아래서도 사람들은 무엇인가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느낌을, 우리가 진정한 민주주의를 구가하지 못하고 있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그 원인 중의 하나는 미성숙한 여론에 있을 것이다. 안씨를 살해한 박기서씨를 비난하는 독자들이 많았다. 사람들은 그를 인간적으로 비난했고, 역사적 증언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잃게 했다고 책망했다. 그러나 체포된 박씨가 당당한 모습을 보인 것은 오히려 여론이 자신의 편이라고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며칠 전 본지 여론독자부에는 한 통의 「청원서」가 배달되었다. 발신단체를 알 수 없는 이 「청원서」에는 200명 가량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박씨의 행동이 실정법에 저촉된다 하더라도 민족의 생명력을 일깨워준 점을 생각하여 선처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런 견해들이 박씨를 행동으로 몰고 갔을 것이다. 법원이 최 전대통령을 법정에 세운 것도 여론의 힘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여론의 한계를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서울의 여론조사기관은 10여개에 이른다. 그러나 안씨와 최 전대통령이 대중의 지지를 받고 있는지, 혹은 지탄을 받고 있는지를 조사·발표한 곳은 없다. 일회적인 여론은 위력이 없다. 튼튼한 전통을 지닌, 조직화한 여론만이 올바른 미래를 열어갈 것이다. 장 그르니에의 말을 덧붙여 마무리하자면, 침묵은 악과 협력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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