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간지의 오피니언면 담당기자들이 신경을 곤두세우는 투고자들이 있다. 한두개 신문에 보내서는 혹시 게재가 안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서 똑같은 내용을 여러 일간지에 동시에 보내는 중복투고자와 여러개의 이름을 가진 「깐수」형, 그리고 남의 칼럼이나 기사를 교묘하게 베껴내는 표절투고자들이다.기자들은 촉각을 날카롭게 벼린 후 투고자의 필체와 문투를 감식한다. 같은 내용이 한꺼번에 여러 신문에 게재되거나, 한 사람의 글이 너무 자주 실려 다른 투고자의 게재기회를 빼앗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요즘은 육필 원고가 아닌 것이 많아 이들을 가려내기가 쉽지 않다.
한 투고자의 여러 이름을 적발해 「블랙리스트」에 올려도 이들은 감쪽같이 새로운 이름을 개발해 낸다. 이름 뿐 아니라 새 주소와 은행 온라인계좌까지 완벽하게 갖춰 담당자들을 골탕먹인다. 때론 이들과 숨바꼭질하는 듯한 기분이 들때도 있다. 얼굴도 모르는 열성투고자들과 두뇌싸움을 벌이지만, 종종 이런 일에 회의를 느끼게 된다. 사실 이들만큼 성실한 시민도 없기 때문이다.
뿌리깊은 유교적 정서와 권위주의 체제의 유습은 우리에게 『말 안하고 가만히 있으면 둘째는 간다』는 얄팍한 처세의 지혜를 가르쳐왔다. 그러는 사이에 우리는 서로에게 냉담한 방관자가 됐다. 우리는 집에 도둑이 들었을 때 『도둑이야』보다는 『불이야』라고 소리쳐야 효과가 있다고 들어 왔다. 대낮에 거리에서 부녀자가 폭행을 당해도 외면하는게 지금의 세태다.
그러나 투고자들 만큼은 주변에 눈과 귀를 열고 사는 사람들이다. 경기 광릉 숲이 죽어감을 개탄하며 환경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기도 하고, 골목 어귀의 비디오방 아저씨가 몇년째 가게 앞 넓은 도로를 깨끗이 쓸고 있다며 가슴 따뜻해지는 소식을 전하기도 한다. 나라에 대형사건이 터졌을 때는 이들이 전해올 의견이 은근히 궁금해지기도 한다.
이들은 사회의 엄정한 감시자이자 미담의 메신저이기도 하다. 거창하게 말하면 참여 민주주의의 성실한 실천자인 셈이다. 그래서 얄미운 중복투고자, 다인격 투고자도 소중하게 느껴진다. 다만 지나치게 독선적인 주장일 경우 공동체의 삶과 정서에 해가 될 수 있다고 생각되기도 한다. 「내」가 아닌 「우리」를 생각하는 많은 소리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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