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하게도 한국문화에 있어서 「해체」란 말을 최초로 사용한 당사자로서 한 마디 해야 할 것 같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왜 해체가 필요했는가. 여기에 대한 사려분별없이 해체를 위한 해체적 징후가 노골화하고 있어서 더 이상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입장이 되고 있다.내가 80년대 벽두의 문학판, 특히 시에 있어서 해체적 징후를 논한 것은 전시대적 고정관념을 무너뜨리는 현상에 대한 진단이었다. 그러면서 문화에 있어서의 해체적 징후는 현실해체와 맞물린 80년대 전위세대의 고통스런 현실인식에서 찾았다. 실천의 전위들은 장르의 개념을 해체하면서 민중현실로 파고 들어갔고, 자기 반성적 시인들의 해체적 경향은 긴장과 억압의 시대에 대한 무정부적 상상력의 산물로 보았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90년 중반의 해체는 도대체 무엇을 뜻하는가. 언어의 파괴와 희롱인가, 아니면 억압된 성의 벗기기인가, 짜깁기의 혼성모방인가. 그리하여 비몽사몽의 무의미에 떨어지는 것인가.
해체란 용어는 원래 재건설의 단계를 전제로 한 전환기적 문화현상이다. 끝없는 해체는 결국 말세적 무의미로 떨어진다. 최소한 내가 사용했던 해체의 개념은 현실구조가 해체되고 재구성되는 과정에 필연적으로 드러나는 문화의 「헤쳐 모여」현상을 의미한 것은 아니었다. 말의 정서를 파괴하는 퍼포먼스도 아니었고 발상에 의존하는 경박한 웃기기도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 세상은 끝없는 해체만 있을 뿐, 재건설의 의지도 방향도 보이지 않는다. 지금 전국에서는 낡은 아파트의 재건축사업이 한창이다. 낡은 문화는 허물어뜨리는게 당연하다.
그러나 대책없이 허무는 재미에만 심취할 게 아니라 재건축의 설계를 해야 한다. 지금 우리 문화가 안고 있는 가치중심의 상실과 경박함은 해체정신에 대한 정확한 인식의 결핍에서 비롯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이제 재건의 미학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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