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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질서와 성감별/김재순 가톨릭대 부총장(화요세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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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질서와 성감별/김재순 가톨릭대 부총장(화요세평)

입력
1996.11.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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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선호·생명경시 병든 우리사회의 무서운 자화상/자연섭리 거스르면 반드시 대가 치를 것얼마전 「현대사회와 성윤리」를 주제로 한 심포지엄에 참석할 기회가 있었다. 그 자리에 참석한 사회의 주요인사들은 모두 우리 사회의 급속도로 변해가는 성윤리를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었고 이에 따른 파행적인 현상도 깊이 우려하고 있었다.

일일이 열거하지 않아도 우리가 사는 96년은 가히 「성의 시대」이다. 이러한 현상은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억눌려 왔던 성문제가 다양성과 개성을 선호하는 문화적 흐름에 따라 전격적으로 표면에 드러나기 때문으로 보인다.

인간의 성 또한 개인이 가진 가장 중요한 요소중의 하나이므로 그 자율성과 개성이 존중되어야 하는 것은 민주사회의 중요한 덕목이라 볼 수 있겠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존엄성과 자연의 질서를 교란시키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 성문제가 파행적으로 가느냐, 보다 성숙한 사회로 가는데 이바지하느냐의 문제는 바로 이 점이 기로가 될 것이다.

하지만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태아성감별의사의 구속은 우리 사회의 생명가치와 사회구조의 모순을 함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우리 사회가 갖고 있는 개방성과 자율성, 그리고 가부장제의 온존이라는 혼돈 속에서 여성과 생명의 경시로 드러나고 있는 대표적인 예 중 하나가 태아의 성감별문제라고 볼 수 있다.

태아성감별로 세상에 나오기도 전에 살해당하는 여아가 전체 여아의 9%에 미친다는 통계는 드러나지 않은 수치를 감안하면, 10명중 1명정도는 소중한 생명을 받고도 인간의 힘에 의해 세상의 빛을 한번도 보지 못한채 단지 여아라는 이유만으로 죽어간다는 것을 뜻한다. 그로 인해 성비는 매년 빠른 속도로 파괴되어가고 있다. 94년말 통계로 우리나라의 성비는 여아 100명당 남아 115.5명이고 세계의 통계가 106명인 것에 비해 이 숫자는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한다.

우리 사회에서 이러한 맹목적이고 결과도 뻔한, 무서운 생명파괴가 그것도 고학력을 가진 사회 지도층에 의해 성행하는 원인은 무엇일까? 그것은 당연히 우리 사회에 뿌리깊이 남아 있는 남아선호사상과 사회 전반에 퍼져있는 남녀차별구조이다. 말하자면 「여자로 태어나 그 어려운 수난을 겪으며 사느니 태어나지 않는게 낫다」는 부모의 냉혹한 정과 이기심이 가부장제와 호주제도, 그리고 「돈이면 뭐든지 다한다」는 물신주의에 몸을 던진 산부인과 의사들이 결탁해 신의 뜻을 받은 생명을 살해하는 것이다.

성감별로 인한 생명살해가 사회윤리에 위배되고 실제적인 불이익을 가져오는 것보다 더욱 무서운 것은 신의 윤리, 자연의 윤리를 거스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만든 사회가 그것을 파괴한다면 인간 또한 멀지않은 시간안에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 하물며 그 대상이 인간인 어린 생명임에랴.

남자가 여자를 억압하는 제도가 사회적으로 팽배하지 않았더라면 당연히 태아성감별이라는 해괴한 의술은 아기의 건강상태를 열심히 진단하는 기술로만 쓰였을 것이다. 우리들의 머릿속에 뿌리깊게 자리잡힌 남아선호사상 또한 그 제도 속에서 키워져 온 것이다. 그러한 역사와 현실이 없었더라면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일도 없었을 것이요, 그로 인해 심각한 사회불안을 겪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자연을 정복했다고 생각한 것이 결국은 환경위기로 다가오고 있는 현실에 살면서 우리는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만이 인간에게 주어진 몫이라는걸 알게 된다.

남녀불평등 남아선호 태아성감별 낙태로 이어지는 고리는 생명존중이라는 대자연의 원칙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우리들의 슬프고 무서운 자화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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