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임중 ‘한건’의식 정책 흔들어/연구보다 새 계획안 짜기 바빠『정권이 바뀌거나 신임장관이 들어설 때마다 과학기술 정책의 골격이 뒤바뀝니다. 정책에는 일관성이 있어야 하는데 왔다갔다 춤을 추니 지속적인 연구가 어렵습니다. 연구가 천직인 연구원들의 사기와 의욕이 떨어질 수 밖에요』
대덕연구단지의 동요는 무엇보다 조령모개식 과학기술 정책에서 비롯하고 있다고 연구원들은 입을 모은다. 연구원들은 취재팀에게 정부 정책에 대한 불만을 솔직히 털어놓으면서도 소속과 이름을 감춰줄 것을 간곡히 부탁했다. 보도될 경우 과기처는 물론 소속 연구기관 책임자에 호된 질책을 듣기 때문이라고 했다. 전임장관 시절 생명공학연구소 선임연구원 L박사는 과기처의 연구과제중심 운영제도(PBS)의 문제점을 공개적으로 지적했다가 혼쭐이 났다. 현재 그는 언론과 접촉하려면 연구소장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한국에너지기술연구소 K박사의 주장은 새겨들을 만하다. 『장관이 바뀔 때마다 기발한 아이디어가 쏟아집니다. 하지만 제대로 추진되지도 못한 채 캐비닛 속에서 잠자기 일쑤에요. 임기중에 실적을 보여 정치적 발판을 만들어야 하는 「실적주의」탓이겠지요. 그렇다고 장관의 재임기간이 길면 몰라요. 고작해야 1∼2년 밖에 안됩니다』
K박사의 주장대로 역대 과기처 장관은 대부분 단명했다. 67년 과기처가 발족한 이후 장관의 평균 재임기간은 1년9개월 정도다. 8월 취임한 16대 구본영 장관은 벌써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대사 내정설이 나돌고 있다. 대덕연구단지 연구원들은 『과학기술 분야의 특성상 일관성있는 정책을 위해서는 장관 재임기간이 4∼5년은 돼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장관이 수시로 바뀌더라도 정책의 뼈대가 유지되면 다행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82년 시작된 특정연구개발사업은 5공 시절 사업내용이 5번씩이나 바뀌더니 6공 들어서도 두세 차례 큰변화를 겪었다. 6공 말기 특정연구개발사업은 국책연구중심에서 「G7 프로젝트」로 흡수·통합됐다.
생명공학연구소의 또다른 L박사의 말은 당시 연구원들이 겪었던 혼란을 짐작케 한다. 『정부가 90년 국책연구에 재원을 집중한다고 해 42개 과제를 선정하느라 1년여동안 과학기술계가 흔들흔들했습니다. 그런데 그뒤 정부 방침이 상품화기술 우선정책으로 바뀌는 바람에 다시 「G7프로젝트」 11개 과제를 선정한다고 1년을 허비했어요. 국책과제를 수행하던 연구책임자들은 새 연구계획서를 작성하는 일로 한바탕 홍역을 치렀지요. 그런 일이 반복되면 정책에 대한 불신이 깊어지기 마련입니다』
「G7프로젝트」는 6공말기 1년여동안 수천명의 연구자들을 동원해 내놓은 선도기술 개발과제. 이에 따라 기존의 국책연구 프로젝트가 중단되면서 일부 기초과학에 대한 연구비 지원이 축소되는 등 적지않은 부작용이 나타났다. 당시 김진현 장관은 장기적인 과학기술 발전기획보다는 언론홍보에만 열을 올린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문민정부 들어서도 과학기술 분야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대덕연구단지 연구원들은 김영삼 대통령의 과학기술분야 대선공약을 예로 들었다. 『장관을 부총리급으로 격상하고 청와대에 과학기술 특보를 두겠다는 약속이 오간데 없어졌다』
6공말기 하루가 멀게 언론에 오르내리던 G7프로젝트는 문민정부에서 종적을 감춰버렸다. 김시중 장관은 취임초 기자간담회에서 『산하 연구소로부터 G7프로젝트에 대한 비판적 의견을 많이 들었다. 종합적인 의견수렴을 거쳐 이 프로젝트를 수정·보완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수출부진과 제조업 경쟁력 약화를 극복하기 위해」 중간핵심기술 개발정책(일명 미디엄테크)을 불쑥 내놓았다. 김장관은 이 정책을 G7프로젝트와 함께 추진하겠다고 강조했으나 『과학기술을 경제의 논리로 둔갑시킬 소지가 있는 졸속정책』이라는 과학기술계의 반발을 사고는 이를 사실상 거둬들였다.
정근모 장관이 내세운 중간진입전략도 설득력을 갖지 못한 채 따가운 눈총을 받아야 했다. 선진국에서 개발해 놓은 첨단기술을 받아 들이면 연구기간과 돈을 줄일 수 있다는 것이 이 전략의 핵심. 연구원들은 『선진국이 힘들여 개발한 기술을 우리에게 선뜻 건네줄 리 만무하다』며 『우리나라 기초과학의 토대마저 무너뜨릴 가능성을 지닌 위험한 발상』이라고 꼬집었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J박사는 우리나라 과학기술정책의 표류원인으로 「인사의 잘못」을 들었다. 『최고책임자가 과학기술에 관심을 많이 갖고 있으면 제일 좋아요.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지요. 경제관료나 군인출신 등 「이방인」이 장관이 될 경우 엉뚱한 정책을 내놓기 십상입니다. 재임중 실적을 내려고 과욕을 부리다 보니 무리한 정책이 나오지요. 다른 부처도 마찬가지이지만 과기처장관은 특히 정치바람을 타서는 안돼요』
8월 취임한 구본영 장관은 『장관이 바뀔 때마다 정책을 급격히 바꿔 과학기술계의 불신을 초래한 전례를 익히 알고 있다』며 『정책 시행과정에서 합리적인 건의는 적극 수용하겠다』는 입장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취임직후 PBS의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한 별도 대책반을 설치, 연말까지 개선방안을 마련토록 하는 등 과학기술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으나 가라앉은 연구원들의 사기를 어떻게 북돋울 지는 미지수이다.<김성호 기자>김성호>
◎연구과제중심운영제(PBS) 논란/월급도 스스로 벌란 말인가/경쟁원리 도입취지 불구 프로젝트 못딸땐 생계 ‘불안’
「연구과제중심운영제도(PBS;Project Base System)」. 과기처가 올해부터 정부출연 연구소를 중심으로 시행하고 있는 이 제도의 애초 취지는 경쟁원리를 연구개발에 도입한다는 것. 연구원들의 인건비 재료비 기자재구입비 등 직접경비는 물론, 전기료 수도료 등 간접경비까지 프로젝트 비용으로 충당한다는 내용이다.
대덕연구단지의 연구원들은 이 제도의 취지에 대해서는 대체로 수긍한다. 그러나 적어도 『연구원들 보고 월급을 스스로 벌어오라는 것은 말이 안된다』는 지적은 공통이다.
PBS에 인건비를 포함시키는 것이 가장 큰 불만요인. 프로젝트를 꾸준히 따내지 못하면 생계가 위협받는다는 불안 때문이다. 『안정적인 연구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생존권과 직결되는 인건비만큼은 PBS에서 제외돼야 한다』는 주장이 그래서 무성하다.
과기처 김재식 사무관의 얘기는 조금 다르다. 『PBS는 비합리적인 인건비 체계를 개선하기 위한 회계제돕니다. 그동안 연구기관에 인원수대로 인건비를 준 결과 열심히 일하는 연구원보다 제대로 연구하지 않는 연구원이 많은 월급을 챙기는 경우까지 있었어요. 그런 맹점을 제거하자는 것입니다』
과기처는 프로젝트를 맡지 못한 연구원들도 국가에서 부여된 별도의 과제를 수행하면서 재충전의 기회를 갖도록 월급을 줄 뿐만 아니라, 정년도 보장한다고 강조한다. 그런 보장이 있는 만큼 『연구활동의 효율성과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연구소에 경쟁원리를 도입하는 것은 불가피하다』는 설명이다.
그래도 연구원들의 우려는 가시지 않는다. 프로젝트를 발주하는 과정에서 능력위주의 공정한 평가가 이뤄질 지에 대해 연구원들은 고개를 가로젓는다. 학연 지연 등 연구업적과 무관한 잣대를 들이댈 가능성이 있다는 것.
그경우 연구책임자들은 아이디어의 창출보다 프로젝트를 따내기 위해 과기처 등을 들락거리며 로비에 열중할 수 밖에 없다는 우려가 널리 퍼져 있다.
과기처도 이런 우려를 부분적으로 인정, 『평가체제를 정비해 유능한 연구원이 인정받도록 하겠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구본영 장관은 『PBS는 시행과정에서 문제점들이 드러나고 있기 때문에 「보완대책반」을 구성, 연말까지 개선안을 내놓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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