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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학의 미래 ‘대덕’이 흔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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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학의 미래 ‘대덕’이 흔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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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11.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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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출연 연구기관 17곳/석·박사만 4,000명선/그러나 이들의 60%는 이직을 꿈꾼다/연구소 통폐합·민영화설로 불안해지는 신분/임금도 고작 기업의 70%/그나마 프로젝트를 못따면 월급마저 없을수도/대기업 하청을 얻기위해 과학자는 세일즈에 나서고 낙하산 인사에 푸념소리 깊은 곳『정부 프로젝트의 90%는 엉터리입니다』 한국 과학기술의 요람인 대덕연구단지에서 취재팀이 만난 정부출연 연구소 연구원들은 너무도 쉽게 충격적인 고백을 하고 있었다.

공학박사인 한국기계연구원 S연구원. 『정부 프로젝트에는 실패가 있을 수 없어요. 연구원이 실패했다고 생각해도 실패라고 기록할 수 없습니다. 그럴 경우 다음 프로젝트를 맡을 수 없거든요. 정부가 던져준 과제는 무조건 결과가 나와야 합니다. 외국의 경우 정부 프로젝트의 3%정도만 성공하면 국가발전에 도움이 된다는 평가를 내리지만 우리는 97%의 성공률을 자랑합니다. 결국 90% 이상이 거짓이라는 얘기죠. 사실 실패한 프로젝트도 자산입니다. 실패가 축적돼야 성공이 보장되는 것 아닙니까. 하지만 우린 시행착오가 용납되지 않아요. 그래서 포장만 번드르한 거지요』

830여만평의 대덕연구단지에는 기업부설연구소 정부출연연구소 등 모두 56개 연구기관이 입주해 있다. 이중 문제가 심각한 것은 정부출연연구소. 과학기술처 산하 22개 출연연구소중 17개가 대덕에 몰려 있다. 정부출연연구소의 총인원은 행정요원을 포함해 8,800여명으로 박사 2,300여명, 석사 2,000여명 등 석·박사가 전체의 절반을 차지한다. 이직자는 연평균 400여명으로 4.7% 수준이며 이중 연구원이 180명 가량이다. 올해는 6월까지 연구원 112명을 포함, 총266명이 연구소를 떠났다. 이직율로만 따지자면 과기처의 말대로 공무원(5.1%)보다 오히려 낮다.

그러나 문제는 연구원들이 기회만 주어지면 떠나려 한다는 것이다. 전국과학기술노동조합이 올초 정부출연 연구소 종사자 1,000여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 「기회가 오면 이직하겠다」는 응답이 53.3%, 「옮겨갈 곳을 찾고 있다」는 응답이 8.7%였다. 60%이상이 언제라도 떠날 채비를 하고 있는 셈이다.

왜 떠나려는 것일까. 60년대 말 정부의 막강한 지원을 받으며 출범했을 때 정부출연연구소에는 해외유학파 박사 등 유능한 인재들이 몰려 들었다. 당시 이들은 유치과학자라는 이름으로 웬만한 대학교수보다 많은 임금과 좋은 대우를 받고 들어 왔다. 그러나 81년 정부가 출연연구소에 대한 대대적인 통폐합을 단행한 이후 4∼5년 단위로 연구소들이 통폐합과 재분리라는 수난을 겪었고 최근에는 일부 연구소의 민영화 소문까지 떠돌면서 대덕단지는 급격히 흔들리고 있다. 통폐합이니 민영화 얘기는 대덕단지가 안고 있는 문제의 심각성을 대변한다.

최근 들어서는 연구과제중심 운영제도(PBS)가 또다른 갈등을 일으키고 있다. 연구비에 인건비와 운영비를 포함시키는 PBS는 극단적으로 말해 프로젝트를 따내지 못하면 임금도 받을 수 없는 제도다. 연구소들은 프로젝트에 목을 매달 수 밖에 없는 처지다. 『소장은 영업과장, 팀장은 외판사원』 한국에너지기술연구소 K박사는 출연연구소의 실태를 이렇게 자조적으로 표현했다. 연구책임자들은 과학자라기보다 세일즈맨이 돼가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지속적인 중장기 과제를 연구해야 할 출연연구소들이 당장 입에 풀칠을 하기 위해 대기업의 하청업체가 된다. 통신분야 등 최근 각광을 받는 분야의 출연연구소에는 오히려 프로젝트가 줄을 서 있고 연구원들은 기본급과 성과급 등을 합쳐 민간연구소의 1.5배에 달하는 소득을 올린다.

그러나 기초과학을 연구하는 대부분의 출연연구소들의 프로젝트 얻기는 하늘의 별따기이다. 대학이나 기업에도 기초과학분야는 더 이상 뚫고 들어갈 자리가 없다. 직장을 옮기려 해도 이제는 받아줄 곳이 없는 것이다. 이들은 정부를 원망하고 이곳에 들어온 것을「일생일대의 실수」라고 한탄한다.

출연연구소의 조직 내부 문제도 심각하다. 한 연구소의 C박사가 책임을 맡고 있는 3개 연구실의 기자재는 총 1억8,000여만원 상당. 그러나 이를 정리하고 연구할 인원이 C박사 혼자다. 값비싼 시설이 방치돼 녹슬고 있다. 이 연구소는 조직이 역피라미드의 기형인 것이 특징. 정작 일을 해야할 곳에는 사람이 없다. 입학연도는 없고 졸업연도만 있는 박사, 어느틈에 연구원으로 둔갑한 고졸 또는 문과 출신 행정요원. 「낙하산」들이 조직의 기반을 흔든다.

임금도 불만이다. 출연연구소 연구원들의 임금은 기업체 부설연구소의 70%, 대학 교수의 80∼85% 수준이다. 대덕연구단지 인근 대화공단의 한 기업주가 직원들에게 『못줘도 대덕단지 연구원 만큼은 주지 않느냐』고 큰소리쳤다는 얘기는 유명하다.

연구원들은 자신들에 대한 사회적 인식때문에 자조하기도 한다. 『신호위반을 했을 때 경찰에게 연구원이라고 하면 두말 않고 딱지를 뗀다. 그러나 이름없는 대학이라도 교수라면 「알만하신 분이…」라며 슬쩍 보내 주기도 한다』 생명공학연구소 J박사의 말이다.

그 결과 연구원들은 그저 대학으로 가고 싶어 한다. 대학이 진정 연구할 수 있는 곳이냐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모대학 교수 1명을 뽑는데 수십명의 지원자가 몰린 일이 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한 연구소 팀동료 수명이 동시에 지원, 경쟁을 벌였다.

연구소 내부의 책임을 지적하는 자성의 소리도 있다. 과거 출연연구소는 연구를 하든 않든 월급은 나왔다. 연구 성과가 없어도 별다른 불이익이 없었다. 대덕을 떠나 서울의 한 대학으로 자리를 옮긴 L교수. 영국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대덕의 한 연구소에 들어갔으나 6개월만에 회의를 느끼고 탈출을 결심했다. 연구소에서는 시키는 일도, 할 일도 없어 머리가 녹슨다는 느낌이 들었다. 급여도 박했다. 어떤 동료들은 놀 궁리만 했고 핑계만 있으면 서울로 출장을 가려했다. 서울바람도 쐴 수 있고 출장비에서 고물이 떨어지기 때문이었다. 그냥 있다가는 똑같은 악순환에 빠질 게 뻔했다. 그는 백방으로 손을 써 5년만인 지난해 가을 탈출에 성공했다.

잘 꾸며진 녹지와 맑은 공기, 완벽하리만큼 잘짜여진 대덕연구단지는 겉으로 보기에는 평온하기 그지 없었다. 그러나 내부에서는 한국 과학기술의 미래가 무너져 내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같았다. 『떠나고 싶지만 갈 곳이 없다』는 한 연구원의 푸념이 귓전을 맴돌았다.<조재우 기자>

◎대덕출신 기업가모임 원종욱 회장/“온실속의 연구소와 벤처기업간 연계 필요”

『대덕은 우리에게 첫사랑의 연인같은 존재입니다. 연구원 시절 책상서랍 속에 묵혀 두었던 전문기술이 현재의 우리를 있게 한 최고의 자산인 걸요. 막상 연구소를 떠났는데도 멀리 가지 못하고 이렇게 단지 주변에서 맴돌고 있지 않습니까』

「대덕 21세기」. 대덕연구단지 안에 있는 각종 연구소를 박차고 나와 대전·충청지역에서 소규모 벤처기업을 운영하고 있는 석·박사들의 모임이다.

지난달 17일 발족한 이 모임에는 현재 정보통신 생명공학 반도체장비 의료기기 등 첨단제품과 신기술을 개발하는 37개 업체 대표가 참여하고 있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 1회 졸업생으로 한국표준과학연구원에서 14년동안 연구원생활을 하다 89년 「원다레이저」를 창업한 회장 원종욱씨(48).

『연구소가 온실이라면 기업은 전쟁터지요. 엔지니어로 샐러리맨으로 회계책임자로 1인3∼4역을 감당해야 합니다. 기술력을 밑천으로 창업에 나서지만 「성공했다」는 소리를 듣기는 쉽지 않습니다.

대부분 자본이 풍부하지 못해 농기계창고 지하실 등을 얻어 첫살림을 시작하는데 편안하게 잠을 자려면 최소한 2∼3년은 지나야 가능합니다』

이들은 신제품 개발보다 섭외나 판매 등에 우선 어려움을 겪는다. 심심찮게 사기도 당한다. 대기업이나 외국기업 등 「공룡」의 견제도 만만찮다.

『어떤 업체에서 부가가치가 높은 시제품이 만들어졌다』는 소문만 퍼지면 공룡들의 무자비한 덤핑공세가 시작되고 힘없는 그들은 결국 백기를 들게 된다.

「대덕 21세기」의 장기적인 목표는 첨단핵심기술의 산업화. 고부가가치의 첨단과학기술을 제품화, 수입대체와 수출효과를 노린다는 다짐이다. 청사진은 밝다.

『2,000년까지 대덕연구단지 주변에 300여개의 연구원 벤처기업이 들어설 수 있는 분위기 조성에 우선 힘을 쏟아야지요. 그러면 대덕은 과학두뇌의 단순한 집결지가 아니라 산·학·연이 어우러진 전초기지로 거듭나게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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