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작가/역사와 이념이란 인간에게 무엇인가/그 눈뜸의 과정에 사람의 아들이 있었다최근에 발표한 내 소설 「비밀의 문」을 읽은 독자들은 그 소설의 내용과 형식에 대해 말하면서 모델이 되었던 작품은 무엇이었느냐고 종종 묻는다.
모델이라는 말이 썩 마음에 드는 용어는 아니지만, 어쨌든 내용과 형식 면에서 어딘가 낯익은 구석이 발견된다는 말일 터인데 나는 서슴없이 대답한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과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개미」라고.
앞의 것은 추리적 기법을, 뒤의 것은 교직적 구성법을 택하는데 힌트를 주었다.
하지만 내용면에서는 아무래도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이 아니었을까.
내가 「사람의 아들」을 처음 읽었던 것은 79년이었고 내 나이 스물두살 때였다. 이른바 YH사건이라 불리는 노사분쟁이 얼마 전에 있었고, 10·26이 일어나기 한달 전 쯤이었다.
당시 나는 병사였다. 「이룩하자 유신과업」이라는 팻말이 꼿꼿하게 서 있는 후방의 한 대공초소에서 나는 이 소설을 보느라 경계를 소홀히 할 수밖에 없었다. 그 소설을 읽을 때만 하더라도 내가 곧 철모에 흰 띠를 두르고 「폭도」를 진압해야 하는 계엄군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스물두살에 이르른 나이였지만 내가 세계관을 가꾸고 자기 정체성을 찾아가는 방식이란 아무래도 책을 읽는 행위였고 그것은 대개 인문과학 분야였다. 나 뿐만이 아니라 당시의 젊은이들은 보들레르를 읽었다. 플라톤과 엘리어트도 읽었다. 모든 젊은이들이 그랬다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젊은이들이 그랬다는 말이다.
아주 적은 소수만이 공장과 야학 등의 「현장」에 숨어서 변증법과 유물사관을 키웠는데 그들은 모습을 쉽게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에 나같은 샌님에겐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80년대에 봇물처럼 터져나온 이러저러한 사회과학 서적은 고사하고 요하임 이스라엘의 「변증법」이라는 책만 소지하고 있어도 불온하게 여기던 시절이었다. 모택동을 마오쩌뚱이라 발음해도 사상을 의심받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대통령이 죽고 12·12가 지나고 5·18을 겪으면서 나는 비로소 내 머리와 의식 속에 자리한 세계관이라는 것이 한사람의 통치자가 엄격히 관리하고 통제한 편협한 교육환경 속에서 이루어진 체제내적 세계관이었을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의 학교교육은 온전히 그의 통치기간에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동안 감추어졌던 세계에 스스로 눈을 떠 가는 수업이 곧장 소설 공부로 이어졌고, 과격하지는 않았지만 내 소설은 자연스럽게 사회과학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쓰여지고 있었다. 우리의 80년대란 민중과 분단상황으로 집약되는 사회과학을 도외시하고는 기를 펼 수 없었던 시절이었으니까.
그러다가 90년대의 중반을 넘으면서 나는 비로소 역사랄지 이념이라는 거대서사에 대해 일정한 거리를 두고 바라보게 되었다. 그리고 스물두살에 읽었던 「사람의 아들」을 다시 떠올렸던 것이다.
「사람의 아들」은 우리가 역사에서 혹은 종교에서 혹은 학문에서 흔히 빠질 수 있는 담론에 대한 섣부른 믿음을 경계하고 있다.
역사의 이면을 소설적 상상력으로 재구성함으로써 기존의 역사를 뒤엎고 그것에 대한 반성과 회의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실로 17년만에 새삼스레 「사람의 아들」이 떠오르고 주제면에서 엇비슷한 「비밀의 문」을 써낸 이유는 아무래도 인간의 이성과 언어라는 것이 인류사와 우리 현대사에 끼친 해악이 안타까워서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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