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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경 「떠나가는 배」/불안의 심연 극복하는 힘(소설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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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경 「떠나가는 배」/불안의 심연 극복하는 힘(소설평)

입력
1996.10.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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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문학」 가을호에 발표된 이혜경의 「떠나가는 배」는 아버지의 49재를 치르기 위해 모인 한 집안 사람들의 이야기를 막내 아들의 시각에서 펼쳐보이고 있는 작품이다. 49재라는 의식이 확고한 무게 중심으로 소설 속에 버티고 있다는 점, 서울서 주인공의 고향마을 부근에 있는 절까지 가는 여정이 이야기 진행의 견고한 축을 제공하고 있다는 점, 치밀하고 안정감있는 문체가 소설의 처음부터 끝까지 관통하고 있다는 점 등이 서로 어울려, 「떠나가는 배」라는 작품을 탄탄하게 균형잡힌 단편문학의 한 전형으로 만들어 주고 있다.그런데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디테일의 측면에서 볼 때 이 작품을 읽는 독자의 시선을 우선적으로 끌어당기는 것이 안정이니 균형이니 하는 단어와는 정반대의 위치에 놓이는 것들이라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서 말해 보자.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주인공에게 한 낯선 청년이 다가오더니 세상의 종말에 관한 교리를 전도하려 든다. 주인공의 아내는 주인공을 향해 『검은 연기처럼 종말은 다가오고 있어요』하고 말하며 공포에 떨곤 하더니 결국 사산하고 만다. 주인공 아버지의 49재를 주관한 노승은 옛날부터 주인공을 만나기만 하면 『신유년에 전쟁이 일어 술해년엔 사람이 여럿 죽어나간다…』 운운의 말을 들려주곤 하더니 49재가 끝난 후에도 그를 따로 불러가지고는 이 절이 있는 산이 난세의 좋은 피난처이니 난리가 나거든 가족과 함께 당장 이곳으로 와서 모면할 도리를 찾으라고 충고하는 일을 잊지 않는다. 「떠나가는 배」라는 작품 속에서 가장 먼저 인상적으로 다가오는 부분이 바로 이런 대목들인데 이 모두는 불안과 죽음의 분위기를 환기시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리고 사실 불안과 죽음의 분위기만큼 안정이니 균형이니 하는 단어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존재가 어디있겠는가?

그러나 이런 사실에도 불구하고, 작품을 다 읽고 난 후 독자는 담담한 기분으로, 혹은 무언가 따뜻한 위안을 받은 것 같은 느낌을 가지면서 책장을 덮을 수 있다. 그 불안과 죽음의 분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작품 속에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지 않은 데도 그러하다. 어째서 이런 결과가 가능해지는가. 앞에서 언급한 구조와 문체의 힘이 그것을 가능하게 한 원동력이다. 그리고 또 한가지가 더 있다. 주인공을 포함한 모든 등장인물의 삶을 작품 배후에서 차분히 응시하고 있는 성숙한 어른의 눈길이 그것이다. 문학의 진정한 힘이란 무엇인가를 새삼 생각하게 만드는 대목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이동하 문학평론가·서울시립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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