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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와 글쓰기의 세 가지 기원(신문학사 탐구: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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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와 글쓰기의 세 가지 기원(신문학사 탐구:22)

입력
1996.10.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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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다원시대」·「동면」·전후세대/전후 ‘땅끝­예술가­화전민 의식’ 낳아/「밀다원시대」 문협정통파 중심 절망극복에 초점/「동면」 월남문인들 근대 순수예술로 회귀/전후세대­지방성 딛고 서구 실존주의 지향객:서사정신(산문)이 시간성에 좌우되는 것이라면, 그 때문에 방관적이자 냉소적일 수 밖에 없는 것이라면, 그리고 그것이 역사적 현실을 구성하는 원리라면, 어떤 역사라도 보편성으로도 환원되지 않는 개물의 원리에서 볼 때 6·25는 어떠했을까. 사실 이런 문제제기가 한층 문학적이 아니겠습니까.

주:좋은 지적이군요. 서사양식이 보편성(Allgemeine), 개별성(Einzelheit), 그리고 특수성(Besonderheit)으로 구별되더라도 결국은 동일성(전체성)으로 흡수·통일됨이 원칙이라면, 그 어느 범주에도 들 수 없는 개물성(Singularity)이 있지 않겠는가. 헤겔의 동일성 사유와 대립적인 아도르노적인 비동일성의 영역이라고나 할까. 조금 다른 시각이긴 하나, 사회적 이데올로기에로 환원될 수 없는 개인적 실존 영역이라고나 할까.

객:절망, 불안, 공포로서의 6·25란 실제의 6·25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러한 의식의 6·25이기도 하다는 것.

주:한국전쟁 특파원으로 온 프랑스 기자는 이렇게 써서 본국에 보낸 바 있습니다. 「지금 한국을 실제로 보지 않고는 이 민족이 품은 자기 나라에 대한 실망과 낙담이 어떠한 것인가를 판단할 수는 없을 것이다. 비참의 구렁에 떨어진 이 민족을 앞에 놓고 제 아무리 무정한 자일지라도 자신의 무력함을 탄식하지 않을 수 없으며 눈시울이 뜨거워지지 않을 수 없다. …나 자신이 부끄러워졌으며 짧은 시일이나마 불쌍한 이들 옆에서 그들의 가엾은 생활을 같이 맛보자는 생각이 용솟음쳤다. 그대들은 대뜸 반문할 것이다. 그건 왜? 그리고 그것이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그렇다 그것은 아무 소용도 없을 것이다.」(로우쥬 뱅 에크, 「한국기행」, 왕학수 옮김)

객:국외자의 시선으로도 6·25란 절망 그 자체였다는 것. 동시에 국외자이기에 속수무책일 수 밖에 없었다는 것. 기껏해야 동정의 대상일 수 밖에 없었다는 것.

주:정작 당사자의 처지에 설 때 이 절망은 어떠할까. 이른바 절체절명, 더 나아갈 곳도 한발 물러설 곳도 없는 경지일 뿐, 바로 여기에서 표현(구원)이 시작되는 것. 문학이란 그러니까 자기운명의 얼굴을 보는 행위의 일종이 아니었을까.

객:절망, 불안, 공포를 초극하는 방식이 문학(예술)이었다? 선생께선 지금 전후문학의 실존적 근거를 묻고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이른바 전후세대의 몫일 터인데.

주:절망, 불안, 공포에서 표현(문학)이 탄생한다는 명제를 두고 우리의 전후문학을 규정할 경우엔 먼저 증명되어야 할 것은 전후세대의 등장과 그 문학적 성취보다도 구세대의 그것이 아닐까.

객:조금 짐작이 되는군요. 선생이 항시 겨냥하고 있는 이른바 문학사적 복안의식이겠는데.

주:임시수도 항도 부산의 문학적 형상화가 「땅끝의식」에서 비로소 성립되었음을 증명한 것이 김동리의 「밀다원시대」(1955)가 아니었을까. 「이중구는 팔목시계를 보았다. 여섯시 이십분. 어저께 세시 십오분 전에 탔으니까 꼭 스물 일곱시간 하고 삼십 오분이 걸린 셈이다. 스물 일곱시간 하고 삼십 오분, 그렇다. 그동안 중구의 머리속은 줄곧 어떤 「땅끝」이라는 상념으로만 차 있는 듯했다. 「끝의 끝」(막다른 끝) 거기서는 한 걸음도 더 나아갈 수 없는, 한 걸음 더 내디디면 바다에 빠지거나 「허무의 공간」으로 떨어지고 마는 그러한 「최후의 점」같은 것에 중구의 의식은 완전히 사로잡혀 있는 듯했다.」. 작품 서두이지요.

객:중공군 개입(10·25)에 이어 서울시민에겐 대피령(12·24)이 내렸고, 정부가 다시 부산으로 천도했고(1951·3) 곧바로 역사적인 1·4후퇴가 시작되었던 것. 중공군 6개 군단이 38선을 넘은 것이 1951년 정월 초하루였고…. 6·25를 한갓 소나기 지나가기로 본 54세의 대가급 작가 염상섭은, 서울이 수복된 지 한달이 조금 지난 11월 초, 문득 군복을 입을 결심을 하고 해군사관학교행을 감행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대한민국 정식정부(김동리의 용어)의 정통파로 자처한 김동리는 어떠했던가. 인민군 서울 점령 3개월 동안, 다락방에 혹은 들판 움막에 숨어 겨우 목숨을 건진 김동리에겐 9.28 서울수복도 잠시, 바야흐로 1.4후퇴에 직면하지 않았겠는가. 최후의 피난열차는 27시간 30분만에야 임시수도 항도 부산에 닿지 않았겠는가. 육지의 끝, 최후의 거점, 이른바 「땅끝 의식」에 닿은 셈이군요. 거기서 6·25문학의 한 측면이 탄생했다? 「마음 드디어 견딜 수 없음」으로 말미암아 자살할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는지도 모르지요. 정작 시인 전봉래의 자살사건이 「밀다원시대」의 결말을 장식하고 있었으니까. 그렇지만 선생께서 이 「땅끝 의식」과 「마음 견딜 수 없음」을 문제삼고, 그것이 전후문학의 한 출발점이었다는 주장에는 모종의 의미가 따로 숨어 있는 것 같은데요. 6·25에 대한 이른바 문협정통파의 문학적 기원을 문제삼고 있지 않습니까.

주:맞소. 6·25란 민족대이동(엑소더스)이랄까 재편성으로도 설명된다면, 그 속엔 납북문인, 월남문인 등의 과제도 응당 포함되는 것. 박남수 원응서 김이석 강소천 함윤수 장수철 양명문 김영삼 등이 6·25 이후에 월남한 문인들이지요. 기타 작곡가, 연극인 등도 많았겠지요.

객:그들의 6·25스런 글쓰기의 기원이란 무엇인가. 그것이 김동리로 대표되는 글쓰기의 기원과 어떻게 다른가. 혹시 분단문학의 기원이라도 찾아지는 것일까.

주:잠깐. 비약이 너무 심하면 곤란하지요. 다만 저는 절망으로서의 6·25 의식에서 글쓰기의 기원을 문제삼아 볼 뿐입니다. 월남문인, 예술가의 절망의 의식과 그 초극방식에 관해서이지요.

객:선생은 순문예지 「문예」(1949) 및 「현대문학」(1955)과 맞서고 있던 「문학예술」(1955) 및 「사상계」(1953) 등의 세력분포랄까 인적구성까지 염두에 두고 있는 모양인데요. 실상 6·25가 우리 문단에 큰 두 바퀴를 만들어낸 것이니까.

주:「밀다원시대」에 맞서는 작품으로 저는 김이석의 「동면」(1958)을 들곤 합니다.

객:월남한 예술가들의 절망과 그 극복을 다룬 작품 말이군요. 서두가 아마도 이렇게 시작되지요. 「1.4 후퇴로 대구에 피난 내려가서 우리들이 묵고 있던 집은 화장터 굴뚝이 바라다보이는 대신동 한끝 쪽에 있는 목제 바라크였다.」

주:6명의 연극단원이 집단적으로 월남하여, 오직 서로의 체온으로 한겨울을 견디어 내었지요. 혜란이라는 이름의 여배우도 끼어 있었고요. 「마음 드디어 견딜 수 없음」에 부딪친 단원 하나는 목매어 자살했고.

객:화장터에서 그들이 연습하던 「지평선 넘어」(유진 오닐)의 마지막 대사를 읊조리고.

주:한겨울을 가까스로 견딘 이 단원들은 혹은 미군부대로, 혹은 다방으로 일터를 찾아갔고, 마침내 「사상계」 「문학예술」의 글쓰기에로 나아갔던 것이지요. 이 경우 글쓰기란, 예술지상주의랄까, 예술지향성으로 말해질 수 없을까. 뿌리뽑힌 그들이 기댈 수 있는 근거란 바로 순수예술이었던 것.

객:문협정통파에 있어 땅끝의식(절망, 허무)의 극복방식이 그들 글쓰기의 기원이었다면, 월남문인들의 허무의 극복방식도 그들의 글쓰기의 기원이었다. 그렇다면 그 차이는 또 무엇인가.

주:바로 그 점이 중요한데, 곧 문협정통파의 그것이 전통회귀의 문학이었다면, 그래서 비역사적이었다면, 월남문인들의 그것은 비역사적이기는 마찬가지이나, 서구 근대예술에의 회귀였던 것이지요. 「문학예술」의 편집 기본방향은 피카소와 마티스, 스펜더와 H. 리드 노선에 이어져 있었던 것이니까. 예술가 의식이라고나 할까.

객:지금껏 구세대의 글쓰기의 기원을 검토했다면, 이른바 전후세대란 어떠한가. 이 물음이 훨씬 본질적인 것으로 검토되어야 하겠는데. 선생께선 구세대 쪽에 무게중심을 두는 것 같은데요. 하기야 6·25를 한갓 소낙비로 파악한 작가도 있었으니까.

주:전후세대의 등장, 참으로 가슴벅찬 것이긴 하지요. 초토 위에서 세워진 문학, 이른바 「화전민 의식」으로 요약되는 것.

객:「엉겅퀴와 가시나무 그리고 돌무더기가 있는 황료한 지평 위에 우리는 섰다.」(이어령, 「화전민지역」, 1957.1)라는 목소리란 얼마나 참신했던가. 불의 작업, 신개지를 개간하는 작업이야말로 신세대의 정신이기에 모든 기성의 도덕과 문학을 부정하게 마련 아니었던가. 신세대는 이렇게 말할 권리가 있지 않았을까. 「고향은 폐허가 되고 생명이 화석화될 때 당신들은 어떠한 문학을 했느냐. 시는 표어로 끝나지 않았던가. 소설은 야담 수준, 평론은 기껏해야 정실과 파당의 옹호에 불과하지 않았던가」라고.

주:그런 권리는, 그 다음 세대가 등장하면 또 여지없이 부정되기 마련이지요. 그렇지만 6·25의 초토 위에서 돋아났고, 스스로 화전민이라 우기는 이 전후세대만큼은 뚜렷한 문학사적 의의를 갖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전후세대의 등장이 우리문학의 지방성을 뛰어넘어 세계문학으로 향하게 했다는 것. 화전민 의식의 눈부심이지요.

객:서구의 전후문학(제2차 세계대전)에 맞닿았다는 것이겠는데, 말을 바꾸면 사르트르, 카뮈, 말로 등으로 대표되는 서구의 전후문학, 곧 실존주의 문학에 이어질 수 있었던 것 아닙니까. 장용학은 「구토」(사르트르)를 읽고 「요한시집」(1955)을 썼다고 공언했고, 오상원의 「모반」(1957)은 말로의 행동주의에, 서기원의 「암사지도」(1956)는 아프레게르의 모럴감각에 각각 대응되었던 것이 아니었던가.

주:전후세대의 문학사적 의의는 다음 두 가지로 요약되겠지요. (A)주제상으로는 인간성 옹호(휴머니즘) (B)기법상으로는 언어표현의 확대. (A)는 저항의 문학으로 발전, 마침내 사회적 문제, 참여문학으로 나아가기 마련. 민중문학의 기원이겠지요. (B)의 경우는 좀더 복잡하겠지만, 한국어의 지방성 극복으로 요약되는 것.

객:그러고 보니 6·25란 세 가지 글쓰기의 기원이군요. 땅끝 의식, 예술가 의식, 그리고 화전민 의식. 이로써 이 나라 근대문학은 현대(당대)문학으로 성큼 나아갔군요.<김윤식 서울대 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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