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옷·흰풍선 차림 32만명 눈물 시위일요일인 20일,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은 온통 흰 물결로 뒤덮였다. 벨기에 사상 최대 규모인 32만5,000여명의 시민들이 거리에 나선 시위치고는 지나치게 고요한 것도 특이했다. 시위대는 흰 옷차림에 흰 꽃과 흰 풍선을 들고 침묵 속에 중앙기차역까지 행진했다. 이날 시위는 노조총파업도, 정치집회도 아니었다. 최근 3달간 4명의 소녀가 성적 학대를 당한 뒤 살해되고 두 소녀가 겨우 살아나왔으며 아직도 어린이 6명의 생사를 알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조용한 분노의 외침이었다.
흰색은 어린이의 순진무구함과 희망을 상징하는 색깔이었다. 실종소녀의 언니 나벨라 베네사는 『우리에겐 아홉살반짜리 작은 새가 있었지요. 그런데 둥지를 떠나고 말았어요』라고 말해 시위대의 눈시울을 적셨다.
사태의 발단은 8월15일 희대의 색마 마르크 뒤트루(39)의 집 토굴에서 두 소녀(실종 당시 8세)의 시체가 발견되면서부터. 실종 14개월만의 일이었다. 며칠 뒤 또 다른 두 소녀의 시체가 발굴됐다. 유럽연합(EU) 본부가 있는 이 나라에서, 계몽주의 이후 인류사에서 가장 인간다운 삶이 보장되고 있다는 유럽의 한복판에서, 이같은 끔찍한 일이 생겼다는 엄연한 현실은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충격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범인 뒤트루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경찰이 몇차례 그에 대한 신고를 받고도 수사를 소홀히 해 어린이들의 희생을 막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게다가 최근 고등법원이 이 사건 수사를 맡고 있는 치안판사에 대해 지극히 사소한 이유를 들어 편견에 사로잡혔다는 판결을 내림으로써 충격은 분노로 번졌다.
법원의 이 결정은 범인의 배후에 어린이를 납치, 포르노 영화 촬영이나 매춘에 이용하는 조직이 있고 이들 조직과 고위층 인사들과의 관련사실을 정부당국이 은폐하는 데 모종의 역할을 했을지 모른다는 의혹이 증폭된 가운데 내려진 것이어서 분노는 더 거세져 갔다. 그런 자들이 활개치고 다닐 수 있을 만큼 벨기에의 사법·정치제도가 도덕적으로 파산했다는 데 대한 분노였다.
장―뤽 드하네 벨기에 총리는 이날 수사담당 치안판사를 정당별 쿼터로 임명하는 등 문제가 많은 사법제도를 개혁하기 위해 연내에 개헌을 실현시키고 실종어린이 정보센터도 설립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어린이도 보호하지 못하는 국가의 존재의의가 무엇이냐는 항변을 누그러뜨리기는 당분간 어려울 것 같다.<이광일 기자>이광일>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