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해·칭찬 일색 “자기들만의 잔치”/비판보다 겉멋 치중… 미술계선 돈내고 평사기 관행평론은 누구를 위해 쓰는 것인가. 한국의 문학·음악·미술평론은 독자나 관람객, 청중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찬사로 일관하는 정실비평이 문화계를 지배하고 있다. 『빵틀에 밀가루를 부어 넣기만 하면 같은 모양의 빵이 나오듯 연주자의 이름만 바꾸면 그럴듯한 평이 되어 나온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음악평론가 탁계석씨는 「주례사비평」이 팽배한 음악계의 현실을 직설로 표현했다. 「골상학이나 인상학으로 보아 연주자의 천재성이 인정된다」는 이야기를 평론이라고 써댄다면 그것은 청중을 우롱하는 것이며 연주자를 모욕하는 것이다.
소설집, 시집에 붙여지는 해설도 칭찬일색이다. 냉정하게 비판의 소리를 하면 출판 전에 작가나 편집자가 『불만스러우니 고쳐달라』는 볼멘소리를 해 수정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독자에게 안내자 역할을 해야 할 평론이 갈수록 줄어든다. 문학평론가 L씨는 『요즘 단행본에 곁들여지는 해설은 평론이 아니라 작가와 가까운 사람이 선의로 쓰는 「발문」이라 해야 옳다』고 말한다.
미술의 경우도 비슷하다. 개인전팸플릿과 도록의 서문은 작품의 장단점, 보완점을 지적하는 엄격함보다 의례적인 수사와 칭찬으로 일관한다. 미술계서는 작가가 평론가에게 200자 원고지 10장 분량에 50만원 정도의 원고료를 지불하고 이런 글을 받아내는 것이 관행처럼 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 문학계간지 편집자로 일했던 J씨는 계간지 편집 마감일을 얼마 남기지 않고 계간평 예정작품을 대폭 교체했던 경우가 있다. 지난호 계간지를 훑어보던 경영자가 『남 좋은 일 시켜주자고 잡지 내는 줄 아느냐』고 한마디 던졌다. 이전 호는 물론 다음 호에 평할 작품이 다른 출판사에서 낸 소설, 시가 대부분이었던 탓이다. 비평이 상업논리에 좌우되어 의미를 잃어가는 형편이다.
논리정연하고 명료한 비평을 볼 수 없다는 지적이 최근 들어 부쩍 늘었다. 비평의 질을 갖추기보다 문체와 스타일 등 겉멋을 부리는 데 열성이고 외국이론에 쉽게 물든다. 국문학자가 고전문학보다 푸코, 데리다, 들뢰즈 등 유행하는 프랑스학자의 이론에 해박한 것을 반길 수 있을까. 젊은 평론가일수록 그러한 경향이 심하다는 지적이다. 스타일과 현란한 언어만 살아 있는 평론은 작품 이해에 오히려 방해가 된다. 이런 경우는 미술평론에서 두드러 진다.
「앤티이스태블리시먼트, 데포르마숑, 텍스처, 엘리멘털리즘…」 등 외국어를 무차별로 사용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한 술 더 떠 「이중억압의 패러다임구조, 미적 몽상성, 관조적 금욕, 관계의 장, 만남과 헤어짐의 현상학, 물질과 비물질의 중간지대적, 자생조각적, 형상공간적 발견성의, 절충적 인상파, 차원적 형태의 강조, 층의 상호의존관계, 무언과 불활성의 연소, 공격적인 구조재료…」 등 기괴한 우리말 조합은 그것이 무슨 말인지조차 헤아리기 어렵다. 결국 독자나 청중은 평론가를 신뢰하지 않고 비평을 읽지 않게 된다.
염무웅 영남대 교수는 계간 「한국문학」 칼럼에서 『오늘날 우리 문학비평은 문학적 논의의 형식으로 이루어지는 사회적 공론의 기능을 잃었다. 지금처럼 평론이 소수의 독자 밖에 못 가졌던 적은 일찍이 없었던 것 같다. 과장한다면 문학평론은 이제 자기들끼리만 돌려 읽는 내부적 문건이 되었다』고 한탄했다.<김범수 기자>김범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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