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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경제·사회발전/김세원 서울대 교수·경제학(화요세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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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경제·사회발전/김세원 서울대 교수·경제학(화요세평)

입력
1996.10.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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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서울에서 개최된 한 국제회의에서 발표자의 한 사람인 미국인 교수가 한 말은 깊이 음미할만 하다. 그의 결론은 한 마디로 아시아문화는 유교적 유산이 아시아식 사회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가능성을 탐색해보지 않고 너무 빨리 그것을 포기하고 있다는 것이다.이념대립이 종식되고 공산주의의 위협이 사라지면서 자본주의적 시장경제라는 일원적 질서가 더욱 굳혀지고 있다. 유럽내 계획경제의 종식에 더하여 정부의 과다한 시장개입에 대한 반성은 시장경제 활성화의 욕구를 한층 부추기고 있다. 최근 어느 나라에서나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민영화, 규제완화, 경쟁 촉진 및 개방의 물결은 이러한 시대적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독창성과 포용력

「자본주의 대 자본주의」의 저자로 널리 알려진 M 알베르의 표현을 빌린다면 19세기말 이후의 「국가라는 틀 속의 자본주의」에서 이제 「시장이 국가를 대신하는 자본주의」시대로 접어들었다. 문제는 같은 시장경제라 하더라도 과연 어떤 「체제」를 선택하느냐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이른바 체제의 모색기 또는 우월한 체제를 도입하기 위한 체제간의 경쟁시대로 접어들었다고 할 수 있다. 또 상이한 체제의 기반이 되는 것이 각국 특유의 사회적 가치관, 즉 구체적으로는 제도, 질서, 문화임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이러한 시각에서 우리가 즐겨 예견하는 21세기 아·태시대 혹은 태평양시대는 그 실질적 내용이 상당히 허술하다는 인상을 준다. 물론 경제적 측면에서 본다면 이 지역내 성장활력, 풍부한 부존자원 및 세계 제일의 대규모 시장, 그리고 상호경제적 의존 등 이를 대변해주는 요소들을 열거할 수 있다. 그러나 경제력만을 배경으로 이 지역이 세계경제질서를 주도할 수 있을 것인가.

19∼20세기 중반까지 영국 및 미국 주도의 세계질서가 가능했던 것은 각각 막강한 경제적 힘과 함께 소위 앵글로색슨문화가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영미지역 고유의 문화이면서도 그 자체가 합리적 논리체계를 갖추고 있으면서 동시에 다른 나라들이 수용할 수 있는 포용력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아·태지역이 세계발전의 축으로 등장할 수 있으려면 경제적 번영은 물론 다른 지역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독창적 문화의 개발이 수반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시장경제의 가장 큰 이점은 시간적, 그리고 공간적으로 모습을 달리할 수 있는 체제의 유연성에 있다. 이와 더불어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선진경제의 경우에서도 알 수 있듯이 각 나라가 자기 고유문화의 터전 위에 경제제도, 질서를 운영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예로 미국 일본 독일 및 프랑스 등은 같은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택하고 있다 하더라도 각각 상이한 문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또 이 문화적 기초가 지속적 발전의 기틀을 결정하는 핵심적 요인임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한국경제의 상황을 살펴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다. 우선 근래 논의가 거듭되고 있는 경제곤란 또는 경제위기론도 따지고 보면 근본적으로는 한국적 문화가 정착되지 못했다는 데서 비롯된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단기적 처방이나 정책이 없고 구조적인 현상이라는 데 중론이 모아지는 것 같다. 그렇다면 그 구체적인 실체는 과연 무엇인가.

구조적인 병폐의 하나로 지적되고 있는 과소비풍조나 무절제한 낭비폐습은 모든 경제주체의 경제적 사회적 의식의 결여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렇게 강조되어 왔으면서도 아직도 정착되지 못하고 있는 한국적 노사관계 역시 사회 내 만연된 불신과 이기주의에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한다고 본다. 또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부실공사나 환경오염 또한 개인의 이익, 행정편의주의 및 기업윤리의 부재 등에 그 책임을 돌리게 된다.

○한국적 여건 맞게

이상 몇 가지 예를 들었거니와 이러한 부정적 현상들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 이유가 결코 법, 제도의 결함에서 비롯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하여 많은 법, 제도가 외국으로부터 도입되었고 그 자체가 기본적으로는 설득력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사회적 가치와 관행에 적합하지 않거나 잘 지켜지지 않는다는 데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명분」과 「현실」이 따로 움직임으로써 또 다른 좌절감을 더해 주고 있다.

여기서 외국의 좋은 문화를 본받지 말자는 의도를 주장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외국사회의 장점을 잘 소화해서 우리의 체질에 맞게 한국 특유의 전통문화를 잘 키워나가는 슬기야말로 지속적 발전의 기틀을 확립하기 위한 최소한의 필요조건임을 강조하고 싶다.

끝으로 경제체제나 그 운영이 문화적 바탕에 기초하고 또 문화가 그 나라의 전통과 현실을 반영한다는 점에서 무엇보다도 먼저 한국적 경제·사회의 모습을 근본부터 재점검, 정리할 필요가 있다. 이에 따라 한국적 여건에 맞게 시장경제의 틀을 정착시켜 나가는 작업이 중·장기적으로 당면한 경제난국을 수습하는 실질적인 대안이며 동시에 선진경제로 진입할 수 있는 조건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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