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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위 단상/박승평 수석논설위원(일요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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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위 단상/박승평 수석논설위원(일요시론)

입력
1996.09.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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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꼭 28년1개월전 일이다. 68년 11월 그때 동해안 강릉지방의 달도 지금처럼 둥근 쟁반을 닮아가면서 몹시도 훤했었다. 당시 김신조 일당의 1·21 서울 침공사태에 이어 강원 울진·삼척에 북한 무장공비 120여명이 침투, 우리군이 소탕전을 펼치고 있는 걸 취재하러 한달가까이 그곳에 머무르며 고생했던 기억이 지금도 뇌리에 선하다.오늘과 같이 쭉 뻗은 영동고속도로는 고사하고 대관령이나 한계령을 넘는 국도가 포장조차 되지 못해 미군 지프를 개조한 신문사 취재차들도 공비출몰지역을 한번만 다녀오면 으레 고장을 일으켰던 아득한 시절이었다. 그리고 오늘과 같은 전송시설이나 팩스 및 무선전화도 있을리 없어 날마다 고물 취재 비행기를 띄워서야 공비소탕작전 사진을 가까스로 본사로 나를 수 있었고 기사를 한번 전화송고하려면 목이 쉬어터져야 했던 때이기도 했다. 그때와 지금의 산하가 이렇게 몰라보게 달라졌는데 안달라진 게 아직도 이처럼 많다는 게 신기하면서 다른편으론 억장이 무너지기도 한다.

그때의 무장공비가 없어지기는 커녕 이제는 잠수함마저 타고 여전히 제집 드나들 듯하고 있고, 막강국군이나 30년가까운 유비무환과 총력안보는 어디가고 여전히 방어망에 구멍이 뚫려있어야 하는 것인가.

어디 그 뿐인가. 그때나 지금이나 믿을데라고는 강원 산간의 순박한 시민들뿐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해안을 지키는 사람들이 놓친 잠수함을 찾아내고 산길을 달려 공비를 신고해 생포라도 하게 한게 오직 시민들이었다는 게 하나도 달라지지 않고 있는 현실인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달라지지 않은 게 분명히 있다. 그 강릉의 휘영청 밝은 달이다. 하루종일 지프를 타고 소탕작전이 펼쳐진 오지를 헤매다 돌아와 대관령머루주 한잔으로 목을 축이며 공비의 만행에 분노하고 언제까지 남북이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비감에 겨워 바라봤던 그 달인 것이다. 그때 함께 취재했던 K부장도 고인이 된 지 오래인데 28년이 지나고서도 또다시 무장공비가 아무 대책없이 횡행한다면 이제 누구와 강원도로 취재길을 함께 떠나야 할 것인가.

며칠이 지나면 한가위다. 쟁반같은 둥근 달이 여전히 남산위로 떠오를 것이고, 2,800만명의 사람들이 귀향길에 오르는 북새통도 변함없이 빚어질 시점이다. 한해의 풍요에 감사해 크게 갚아야 한다는 뜻의 명절 중의 명절이라는 한가위를 앞두고 이번 추석의 차례상 앞에서는 간절히 기원할 일이 더욱 많아지겠다는 생각이 벌써부터 뇌리에서 떠나질 않는다.

때마침 추석 차례상차리는 법이 소개되고도 있다. 해외여행지나 휴양지 콘도에서 적당히 상을 차리는 게 유행이라는 오늘의 세태다. 그래서 차례상은 반드시 북쪽으로 하고, 홍동백서(붉은 색 과일은 동쪽, 흰색은 서쪽) 좌포우혜(왼쪽에 포, 오른쪽에 식혜) 어동육서(생선은 동쪽, 육류는 서쪽)를 새삼 강조하는 게 무슨 소용이겠는가. 하지만 이번 한가위만은 어쩐지 그런 격식을 일부러라도 꼭 지키면서 간절히 빌고 다짐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러고보면 북향의 차례상에서도 남다른 의미를 찾을 수 있겠다. 우리는 그 앞에 꿇어 오늘의 북한이 사상과 폭력의 미망에서 깨어나길 기구하면서 우리의 허술하고 줏대없는 자세도 냉철히 반성해야 할 때인 것이다.

사실 「잘만 살면 그만」이고 「꿩잡는게 매」라며 모두가 격식을 내던진 채 황급히 달려오면서 얻은 것도 있었지만 잃은 것도 많았다. 율곡사업이다 자주국방이다 했으면서 북한 잠수함이 멋대로 드나들어도 깜깜이었던 것은 해안방위체제라는 기본격식이 풀리면서 안보의 내실마저 함께 녹슬어 버렸음에 다름아니다.

어디 군뿐인가. 문민화 이후인데도 그 정치성이 오히려 더욱 발휘되면서 체통과 본래의 기능을 잃어가고 있음을 질타당하는 우리 검찰도 있다. 그리고 본분을 잃어 망신살이 뻗친 국회의원과 탈선 정치인들에다 영어의 몸이 되어있는 전직 국가원수, 뇌물죄로 실형을 선고받았던 재벌들과 북에 동조하는 철부지 학생들을 생각하면 나라의 격이 마냥 한심스레 여겨질 지경인 것이다.

사람이나 온갖 제도, 그리고 격식이란 것도 저마다 제자리를 지키며 할 바를 다할때 빛을 발하게 되고 국격도 덩달아 고양되는 법이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이번 추석차례상은 비록 조촐할망정 경건하고 격식에 맞춰 차렸으면 좋겠다. 앞으로는 모두가 지킬 것은 꼭 지키고 할 일은 해나가겠음을 밝은 달과 조상앞에서 간절히 맹세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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