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피를 불어넣는 청동불꽃옛날 옛적에 시가 「떨기나무 불꽃」인 줄 알았던 시인들이 있었다. 그게 나무인 것은 형형색색이 다른 한 떨기 꽃들이 그 곳에서 피고 있다고 그들이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시는 차라리 그 불꽃 다 꺼지고 남은 잿더미에 불과했다.
마지막 연기에 재채기를 해대며 시인들은 뿔뿔이 흩어져갔다. 그리고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후, 한 시인이 여전히 그 곳에 남아 후일담을 기록한다.
남진우의 「죽은 자를 위한 기도」(문학과 지성사간)는 그렇게 죽은 시를 위한 기도이다. 그러나 그 기도는 죽음을 위로하는 기도, 영원한 안식을 희구하는 기도가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죽음은 온 세상에 「곤곤하고, 마치 가시고기와 같이 날카로워서 사방에서 시인을 찌르기 때문이다.
시인의 기도는 그 자체로서 죽음의 위협, 죽음과의 싸움으로 진흙탕이 된다. 죽음 이후는 적막하긴커녕 시끄럽고 흉흉하고 「할퀸 자국투성이다」.
그러니, 죽음은 결코 마감되는 법이 없다. 그게 시의 죽음이든, 전망의 죽음이든 아니면 진실의 죽음이든, 죽음이 90년대 시인들의 화두가 된 이래 시인들은 그 죽음과 싸우기 위해 오래도록 죽음을 지연시켜 왔다.
죽음이라는 사건을 죽음의 과정으로 만들어, 다시 말해 시체를 강시로 만들어 오래도록 죽음을 뛰어다니게 했다. 그렇게 해서 죽음 속에서 꽃필 수 있는 가장 치열한 생의 몸짓을 피워내려 하였다.
기어코, 떨기나무 불꽃은 한 줌의 재로 사그라지지만은 않았다. 불꽃의 말을 상실한 시인의 말은 「그을음을 내며 오래오래 타」지만 아니, 그렇게 오래오래 탐으로써, 기이한 청동불꽃을 피워내고 있었다. 검은 죽음의 세상 속에 붉은 불의 의지와 흰 빛 세상에 대한 희원이 한 데 뒤섞여 들어서 「푸른 인광」을 내뿜었다.
그 푸르딩딩한 인광은 부패해가는 죽음이 마지막으로 내는 소멸의 빛이 아니다. 그것은 죽음 속에 피를 부어넣으려는 마음이 어디에서도 피를 구할 수 없어서 시체를 뜯어 피로 만들 수 밖에 없게 된 시인의 검은 연금술의 화덕에서 파닥이며 튀는 불꽃이다. 아니면 적어도 「피를 다오, 피를 다오」하는 유령들의, 죽은 시들의 떼거리의 산 외침이다.
「죽은 자를 위한 기도」의 힘은 이 현란한 청동불꽃의 회화성에 있다. 죽음이 살아서 피워내는 불꽃이기 때문에 그 불꽃은 무시무시하다. 죽음의 삶이 삶의 죽음과 드잡이하고 있기 때문에 그 불꽃은 음산하고 처절하다. 그리고 아름답다.<정과리 문학평론가·충남대 교수>정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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