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의사로서 심리치료를 웬만큼 하려면 수련과정에서 꼭 간첩교육같은 밀봉교육형태의 개인지도감독을 매주 한 시간 이상 받아야 한다. 교육자와 전공의 단 둘이 마주 앉아 환자치료를 논의하는 이 시간은 얼마나 허심탄회하게 의견교환을 하느냐에 성패가 달렸는데, 옆에 신경 쓸 사람이 없으니 별별 심각한 이야기가 다 나온다. 이런 방식의 교육은 감독자의 영향을 크게 받을 위험이 있는 고로 학기마다 교육자가 바뀌며, 교육자는 대개 첫 시간에 『내 말은 참작만 하고 한 쪽 귀로는 흘려보내게. 내 의견만 좇다보면 자네는 평생 내 아류에 머물게 되네』라는 말을 해준다. 이렇게 4년간의 수련이 끝나면 딱 부러지게 이론체계를 배운 바 없는 전공의의 머리에는 남는 것이 없어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오랫동안 포도주를 퍼 내던 표주박이 속은 비었을 망정 코를 대어보면 포도주 향기가 은은히 올라오는 현상에 이 젊은 의사의 실력이 비유된다 하겠다.○돈·권력 뺀 나머지
개인의 「문화」도 마찬가지다. 그 개인에게서 돈과 권력을 빼놓을 때 그 남는 찌꺼기가 그의 문화다. 우리는 흔히 우리 사회를 이만큼 발전시킨 주역을 독립운동가, 정치인, 군, 경제인, 정부관리들에서 찾는 습관이 있는데 나는 무엇보다도 우리 세대에게 유교를 바탕으로 근대문명에 관한 문화적 소양을 심어 준, 지금은 작고했거나 은퇴한 교육자들을 꼽고 싶다. 농과대학을 나온 어느 고등학교 동창이 들려준 경험담이 생각난다. 평생 첫 해외나들이가 모회사 도쿄(동경)지점장 부임이었던 그에게 떨어진 숙제는 수주확대였지만 그때까지 그 지점은 적자상태였다. 반년간 고민하다가 그는 일대지략을 폈는데, 그것은 교제술자리에 나오는 상대회사원의 과거 해외주재국을 파악해 두었다가 바로 그 나라 가곡과 오페라 아리아를 시치미 뚝 떼고 자청해 원어로 부르는 것이었다. 이 모두가 옛날 음악시간에 배웠던 것이고, 심지어는 불어교과서에 나오는 베를렌의 시까지도 처음 몇 줄을 읊었다 한다. 그가 갖춘 교양에 놀란 상대방은 일거리를 조금씩 주기 시작하였고, 마침내 임기말년에 와서는 수천만달러로 수주가 늘어 흑자의 연속이었다는 말이다.
돌이켜 보니 우리 세대는 비록 수박 겉핥기식이지만 문화소양 기초교육을 비교적 잘 받았다. 고교시절 휴전반대 시가행진을 하고 난 다음 날에도 전교생이 걸어 시공관에 가 해군정훈음악대가 연주하는 교향악을 들었는데, 그 때 미리 박수치고 머쓱해 했던 친구들 얼굴이 지금도 기억난다. 전쟁중 그런 식의 용단을 내려 우리를 교육시킨 교육자들이 참으로 대단한 분들이었다는 생각이 나이들수록 더 든다. 이는 베를린점령 몇 주일 전까지 패퇴하는 독일군진지에 갓 만든 예술영화필름을 꼬박꼬박 비행기로 투하했다던 문화수준 높은 그 쪽 일화에 우리도 맞설 수 있는 밑천을 가졌다는 자부심을 내게 일깨워 주었다.
문화적 소양을 어린 시절 쌓은 지도층이 두터울수록 그 나라는 폐허에서의 회복이 빠르니, 바로 독일 일본 이탈리아가 그 예다. 공산주의에서 깨어난 동구권도 서구와 공유하는 종교와 예술을 바탕으로 한 기본소양에 힘입어 자본주의체제로의 적응이 쏜살같으며 시인출신 체코대통령은 피흘림 없이 슬로바키아를 독립시켜 떠나 보냈다. 해외망명가나 대지주 자제가 아니고서는 해방전 우리는 직접 서양 근대문물에 접할 수 없었는데, 이런 사람은 손으로 꼽을 정도로 소수요, 대다수 나머지는 일본교육을 통해서만이 그럴 수 있었다. 이런 대다수 사람들은 아마도 극일을 최종목표로 일본교육을 받았을 터인데 해방후 북한에서는 지주출신, 친일파, 개인주의자로 몰려 사회에서 대거 축출된 반면 남한에서는 몇몇만이 대표적으로 반민재판에서 수모당한 것을 제외하고는 별 일이 없었다. 일제하 고등사범출신, 대학출신 특히 제국대학출신, 고등문관시험 합격자, 말단관리같은 특수기회를 가졌던 사람들 대부분은 자숙하는 의미에서 있던 곳을 떠나 주로 고등교육계에서 후진교육에 전념하였다. 법조계에 그대로 머물렀던 사람들도 개인성취보다는 초창기 후배교육에 정성을 쏟았었다. 우리 세대를 서양고전음악에 눈뜨게 해 준 음악감상실 르네상스의 주인같은 분도 아마 북한에서라면 갖가지 죄목에 걸려 버티지 못하였을 것이다.
○나라의 「며느리들」
내 분야인 정신의학계도 일제교육을 받은 스승이 있었는데 군의관복무를 끝내고 오는 제자마다 따로 불러 『내 실력은 겨우 학생교육에나 맞을 정도이니 자네들은 죽든 살든 서양가서 공부하고 오게』라면서 등을 밀어내었다. 우리의 오늘은 말 달렸던 선구자들만에게 힘입은 것이 아니다. 국가와 사회를 집안으로 칠 때 호통치는 할아버지와 돈 벌어오는 아버지도 중요하겠지만 애 키우고 부엌살림 맡는 며느리 또한 중요하며, 아니 어쩌면 자라나는 자녀에게 며느리는 가장 중요한 인물일 것이다.
꼬리를 무는 교육감선거의혹 소식이 씁쓸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나는 우리 세대를 키워준 지난 날의 교육자들을 이런 좋은 며느리에 비유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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