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민 흔적없고 성교장면만 남발최근에 단행본으로 출간된 몇 편의 장편소설과 문학잡지에 발표된 수십 편의 중·단편소설을 통독하고 난 후 나는 일종의 비애감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공연히 아까운 시간만 낭비했다는 느낌에 사로잡히게 만드는 작품들이 태반이었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공을 들인 흔적을 찾아보기 어려운 문장으로 이루어진 소설이 너무나 많았다. 뻔한 상식수준의 발상에서 한 치도 더 나아가지 못했거나 혹은 그 수준에조차도 미달하고 있는 소설이 너무나 많았다.
특히 우스꽝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아무런 개연성도 없이―그렇다고 독자에게 낯설음의 충격을 주는 효과도 거두지 못하면서―어거지로 성교장면을 소설 속에 집어넣고서야 안심하는 경우들이다. 이런 경우에 해당하는 소설이야 오래 전부터 발견되어 온 것이지만 최근에 읽은 몇몇 장편 혹은 중·단편 속에서도 이에 해당하는 사례를 어렵지 않게(예상대로!)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런 작품을 만날 때 느껴지는 감상은 「또 이 진부한 메뉴의 재탕이냐?」하는 따분함 내지 지겨움 뿐이다.
그리고 기왕 이런 얘기가 나온 김에 한 가지 더 말해 두고 싶은 것이 있다. 그것은 언제부터인가 우리나라의 소설(그 중에서도 특히 젊은 작가들이 쓰는 소설) 속에서 성교를 나타내는 지배적인 표현으로 자리잡은 것이 「섹스하다」 혹은 「섹스를 하다」라는 표현인데, 다른 사람은 어떤지 모르지만 적어도 나로서는 이런 표현을 만날 때마다 역겨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 역겨움은 두 가지로 설명될 수 있다. 첫째로 그것은 왕년에 미국유학을 했답시고 일상대화 속에서 쓸데없이 영어를 섞어 쓰며 잘난 체하는 그런 종류의 인간들을 볼 때에 내가 느끼는 역겨움과 유사한 성질의 것으로 설명될 수 있다. 둘째로 그것은 작가의 마음 속에 기묘한 형태로 얼크러진 채 공존하는 보수성과 개방성의 양면이 아무런 지적 반성을 거치지 않은 채 그 기묘한 형태 그대로 보기 싫게 노출된 것을 보았을 때 내가 저절로 품게 되는 안쓰러운 느낌에 근거를 둔 것으로 설명될 수 있다.
물론 불만을 안겨주는 소설들만으로 최근의 내 독서시간이 채워졌던 것은 아니다. 좋은 소설을 만났다는 행복감에 잠겨 든 시간도 없지 않았다. 특히 「문학동네」 가을호에 나란히 실린 박범신의 「흰 소가 끄는 수레」와 최인석의 「혼돈을 향하여 한 걸음」이 나에게 준 감동은 참으로 컸다. 이 두 작품에 대한 좀더 구체적인 언급은 다음 번으로 미룬다.<이동하 문학평론가·서울시립대 교수>이동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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