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인간의 성장이나 한 나라의 발전과정에는 수준의 차이는 있으나 언젠가는 성숙의 단계가 있게 마련이다. 그 성숙의 시점이 바로 자기를 제대로 발견한 시점이다.일찍이 헤겔은 자아의 성숙을 자기, 자기탈출, 자기내귀환으로 파악했다. 자기탈출의 과정에는 고통도 있고 환희도 있으며 신바람이 있는가 하면 한이 맺힐 때도 있다. 그런데 참다운 자기성숙은 이 기나긴 자기탈출을 통한 새로운 자기발견 외에 다름 아니다. 한 나라의 성숙도 마찬가지다. 과연 한국은 어디쯤 와 있고 앞으로 어디로 갈 것인가. 이제 우리는 우리 자신과 우리 나라와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확인하기 위해 고민할 때다.
○절실한 우리 것
이런 점에서 최근 우리 사회 일각에서 동양사상 내지 한국사상에 대한 자각이 일고 있는 것은 다행스럽다. 그동안 한국은 분단, 전쟁, 산업화, 민주화등 고난의 역정을 걸어왔다. 기적의 성취와 함께 수많은 시행착오를 경험하면서 이제 자기를 되돌아볼 때가 됐다는 자각이 미미하나마 보이고 있다. 서구 합리주의의 효용과 병폐를 모두 경험한 서양인이 탈냉전시대의 사상의 공백 속에서 동양사상에 흥미를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더욱이 서구적 가치, 서구적 발전모델을 추구해왔던 동양인이 뒤늦게나마 동양사상 속에서 새로운 삶의 패러다임을 찾으려고 하는 것은 당연 이상으로 당연하다.
지금까지 서양인은 자기 내부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과감히 서양바깥으로의 탈출을 시도한 적이 없는데 반하여 많은 비서구국가들은 경쟁적으로 서구화를 자국의 발전모델로 삼아왔다.
생각해보면 서구지식인의 동양과 아시아에 대한 무시는 너무도 뿌리가 깊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마르크스에 이르기까지.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들의 동양에 대한 무시는 다름 아닌 무지의 산물이다. 유가의 조 공자가 서양인들이 최초의 정치철학자로 꼽는 소크라테스보다 81년이나 먼저 태어났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의외로 많다.
고대 중세는 말할 것도 없고, 근·현대에 와서도 서양지식인은 동양의 고전에 대한 본격적인 탐구보다는 우물안 개구리의 오만으로 동양과 아시아를 간단히 처리해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현대는 동양과 서양에 대한 균형적인 지식과 교양을 요구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전후 반세기동안 한국과 일본은 초·중·고 대학교 교육을 통하여 서양을 배워 왔기 때문에 두 나라 지식인은 동양사상의 재발견을 통하여 서양인에게 의미있는 메시지를 보낼 수 있는 지성적 역량이 있다고 본다.
이렇게 볼 때 8월15일 세상을 떠난 일본 사상사가 마루야마 마사오(환산진남) 교수의 문제의식과 방법은 일본 뿐만 아니라 한국지식인의 한국탐구에도 큰 시사를 주고 있다. 마루야마선생은 서양사상과 동양사상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진 일본 굴지의 정치사상사가로서 그의 학문적 업적은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우선 서양인이 이해할 수 있는 「보편적」 개념으로 일본사상의 특징을 분석했다는 점에서 일본을 이해하고자 하는 전세계 지식인의 관심을 모았다. 그는 한편으로 국체 파시즘 등 일본의 보수정신의 허구를 통렬히 비판하면서 다른 한 편 「전공투」좌파학생의 폭력시위를 반이성적 「광란의 어리광」으로 야단쳤다. 그러나 그는 평생 일관되게 「일본적인 것」을 탐구했기 때문에 좌우 양쪽으로부터 폭넓은 존경을 받고 있다. 「일본의 사상」 「일본역사의 고층」 등 그의 저서는 일본사상의 핵심을 이해하려는 일본인과 외국인에게 영원한 생명력을 갖는 작품들이다. 도올 김용옥이 마루야마 교수의 「일본정치사상사연구」를 해설하면서 「한국의 마루야마」가 나와야 한다고 외친 것도 중국이나 일본과 다른 한국사상의 핵을 탐구하는 작업이 얼마나 절실하며 또한 그 작업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동시에 말해 주고 있다.
우리는 부질없는 사상논쟁을 일삼을 것이 아니라 우리의 지역, 계급, 민족갈등을 용해할 수 있는 한국사상의 진수와 그것을 담을 큰 그릇을 만들어 내야 한다. 이러한 작업을 위해서는 지적 사대주의에 대한 반성도 필요하지만 국수주의적으로 질주해서는 결코 안된다.
○성숙의 첫걸음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말이 의미를 가지려면 우선 가장 한국적인 것을 찾아내야 하고 그 속에 있는 보편적 메시지를 체계적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테면 석굴암, 팔만대장경, 훈민정음 등에 아로새겨져 있는 우리의 정신, 한국의 사상을 우리 능력으로 저술하여 지구촌 구석구석에 전파해 나가야 한다.
우리는 바로 우리 자신의 재발견을 통해서만이 성숙의 제1보를 내디딜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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