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민족대당체” 통합운동 앞장/좌·우익단체 묶는 「민족유일당」 건설 주도/임정 초기 내부갈등 수습 결정적 역할도보훈처와 독립기념관이 선정한 「9월의 독립운동가」 만오 홍진 선생(1877∼1946)을 기념하는 학술회의가 6일 하오 세종문화회관 대회의장에서 열렸다. 광복회(회장 권쾌복)와 홍진 선생 기념사업추진위원회가 주최하고 한국일보사가 후원하는 학술회의에는 박영석(건국대) 김창수(동국대) 교수, 윤병석 인하대 명예교수 등이 주제발표자로 나와 민족진영의 대표적 지도자로 민족유일당운동을 활발히 전개했던 만오의 독립사상과 생애를 집중 조명했다.
박교수는 「홍진의 중국동북지역에서의 항일민족독립운동(1927∼1933)」이라는 논문에서 「민족유일당운동을 전개한 합리적 통합운동가」로서 홍선생의 항일투쟁활동을 분석했다. 홍선생은 1926년 7월 상해(상하이)임시정부 제4대 국무령에 취임하면서 시정방침 3대강령을 발표, 민족통합의 중요성을 대내외에 천명했다. 강령의 내용은 「①비타협적 자주독립운동을 진작한다 ②전민족대당체를 건립한다 ③각 피압박민족과 대연맹을 체결하고 기타 우리의 국교를 증진한다」였다. 박교수는 이중 ②항을 홍선생의 독립사상을 집약한 핵심강령으로 꼽고 『그는 지난 날 독립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지 못한 이유가 학연과 지연, 이념의 대립에 기인한다고 판단, 이를 극복하기 위해 군소독립운동단체를 총집결하여 근대적인 이념정당을 결성하려 했으며 그 기본정신은 이후 국내외에서 전개된 민족유일당운동으로 이어졌다』고 평가했다.
만오는 1926년 국무령 사퇴 이후 항일운동의 기지였던 중국 동북지방으로 활동무대를 옮겨 좌·우익의 여러 독립단체를 통합하는 민족유일당운동을 본격 전개한다. 독립단체 간의 이해대립과 이념차이로 통합에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던 그는 1930년 북만주지역의 민족진영 운동단체들을 중심으로 한국독립당과 한국독립군을 결성하기에 이른다. 박교수는 『한국독립당의 조직을 통해 만오는 독립운동 투신이후 일관되게 추구해온 민족대당의 목표를 실현하는데 어느 정도 성공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교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홍진의 위상」을 주제로 발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정착과정에서 만오의 활약상에 대해 설명했다. 김교수에 의하면 그는 임정이 수립초기의 혼란을 극복하고 안정을 찾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었다. 1922년 7월 임시정부 내의 갈등과 대립을 해소하기 위해 이동녕, 김구, 조소앙, 안창호, 이시영, 노백린 등과 협의, 「시사책진회」를 조직했고 이를 통해 임시정부와 국민대표회의 간의 갈등과 분규를 수습하는데 앞장섰다.
이어 윤교수는 「홍진의 민족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의정원문서」라는 주제발표에서 만오가 작고한 뒤 유족들이 국회도서관에 기증한 의정원문서의 내용을 소개했다. 의회 회의록과 임시헌법, 임시약헌, 건국강령, 선언서, 결의안, 예산결산서 등 의정원의 활동사항을 상세히 알려주는 이 문서는 근대사 연구의 귀중자료로 평가됐다. 주제발표에 이어 임영정 동국대 교수의 사회로 진행된 종합토론에는 유준기(총신대) 박성수(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 이상일 위원(국사편찬위원회) 장세윤 연구원(독립운동사연구회) 등이 참석했다.
□홍진 선생 약력
▲1877년 8월27일 서울 출생 ▲1898년 대한민국관립 법관양성소 졸 ▲1910년 국권 상실후 검사직 사임, 변호사 개업 ▲1919년 4월2일 인천만국공원에서 한성정부 수립 선포 ▲1921년 5월 제3대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의장 ▲1922년 9월 임정 법무총장, 1926년 7월 임정 제4대 국무령(대통령) ▲1927년 4월 한국유일독립당 상해촉성회 조직 ▲1929년 생육사 사장 ▲1930년 7월 한국독립당 창당, 당수 취임 ▲1937년 8월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 결성, 대표로 활동 ▲1940년 11월 임정 국무위원회 고문 ▲1945년 12월 임정의정원 의장 신분으로 환국 ▲46년 9월9일 별세<변형섭 기자>변형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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